매거진 매일단어

나이: 궁금해하지 않을 때 진짜 대화가 시작된다

by 담쟁이

내가 일 년 넘게 참여했던 소셜 살롱의 규칙 중 하나는 멤버들끼리 나이를 공개하지 않는 것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만큼 자유롭게 생각을 공유하기 위한 장치였던 그 규칙은 꽤나 효과가 있어서, 대화 중 자연스럽게 나이를 유추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임을 지속하는 석 달 동안 멤버들은 서로를 깍듯하게 ‘-님’이라고 불렀고, 그렇게 부르는 한 누군가의 말이나 생각을-이 모임 밖에서 흔하게 그러하듯이-나이로 판단하거나 폄하할 수 없었다. 신기한 것은 정기모임이 끝나고 정확한 나이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호칭은 물론 관계에 있어서도 큰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속했던 팀들은 그랬다. 일로 만난 사이도 아니고 이제는 사모임의 성격이 더 강해졌으니 누구 한 명 ‘이제 그럼 언니/오빠라고 불러도 돼요?’라고 할 법한데도, 한국사회에서는 보편적이지 않은 이러한 호칭법이 우리 관계에서 어떤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지 체험한 이들이기에 아직까지 그 누구도 선뜻 그 규칙을 깨려는 사람이 없다.


나이 자체는 한 생물이 살아온 시간을 말하는 산술적 혹은 생물학적 정보에 지나지 않지만, 사람들이 부여하는 어떤 가치 때문에 그것은 사회적 정보가 되어 한 개인이나 그 개인이 속한 집단에 영향을 미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내 나이가 어때서’라며 나이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을 용기이자 미덕으로 여기는 관용표현이 범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우리는 ‘나잇값’을 할 것을 계속해서 요구받는다. 젊으니까 도전적이어야 하고, 어리니까 순종적이어야 하지만 그 두 가지 특성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인지 깊이 고민해 본 사람은 없어 보인다. 나이 먹었으니 나대서는 안 되지만 살면서 어느 시점쯤에 내 적극적인 본성을 눌러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고, 연장자이니 더 수준 높은 지식과 지혜의 말을 전해주길 바라지만 사실은 세월 가는 대로 살다 보니 그런 처지가 된 것뿐이지 나이 먹었다고 저절로 지혜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걸 나이 먹어보니 알게 되었다. 하나하나 꼽아보면 나이 담론에는 동의할 수 없는 상식들이 가득하지만 내가 세월을 거슬러 어려질 리도 만무하므로 '나이에 따른 사회적 역할의 변화'라는 이 고루한 말에 익숙 해 지는 수밖에 없다. 세상이 바뀌는 속도보다 빠르게 나이 먹고 있으니 큰 마찰 없이 평범하게 살고자 하면 그럴 수밖에.


하지만 사실 나이가 적고 많은 것도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라 어느 장단에 맞추기가 쉽지 않다. 한 때는 '통성명하고 나면 나이로 서열정리부터 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전적 특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 원인을 깊이 생각해 보았던 적이 있다. 결혼 시장에서 가장 인기 높다는 만 24세 대학원생 시절, 아래위 연배의 사람들에게 ‘좋은 나이’라고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때였으니 내 나이에 대한 한탄이나 자격지심에서 나온 생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닌 ‘나이’ 덕분에 내게 주어지는 많은 칭찬과 혜택과 기회들을 불편하게 느낀 데서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나보다 한 두 살 많던 대학원 동기들은 '너는 아직 어려서~' 아니면 '나는 이제 나이를 먹어서~'라는 말을 습관처럼 붙이곤 했지만,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대화 패턴은 별로 달라진 점이 없다. 앞으로 십 년이 더 지나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그들이 보는 나는 언제나 조금의 기회를 더 가졌고, 부러움의 대상이고, 그래서 내가 그 귀한 시기를 잘 보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두 마디 덧붙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내가 답하는 말은 대개 '젊은 패기'의 영역에 놓이고, 너도 나이 먹으면 달라질 거라는 결론으로 끝나지만 이런 식의 화법을 처음 구사했던 그들이 현재의 나보다 여덟 살 정도 어렸다는 사실은 늘 잊히는 것 같다. 이제는 웬만한 모임 가면 연장자 취급받고 ‘삶의 연륜이 묻어난다’ 어쩐다 하는 소리를 듣는 나지만, 지난 달만 해도 전 직장 선배에게 ‘너는 아직 그런 일을 감당하기엔 어린데’라는 걱정 어린 말을 듣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 그렇게 표현한 적이 없는데, 가만히 있던 착한 내 나이는 상대방의 경험과 생각에 따라 무기가 되었다가 장해가 되었다가 한다.


물론 앞서 언급한 모든 말들이 나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한 것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누군가가 하는 것처럼 서열을 정리해서 강자로 위세를 부리려는 못된 의도는 저들에게 하나도 없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화를 하다가 나이라는 요소 하나로 나를 이해하거나 한정 지으려는 시도를 마주할 때마다, 애초에 서로의 나이를 모르는 상태였더라면, 그래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거나 적은 사람에 대한 나름의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난다면 우리의 대화도 이렇게 놀랍도록 매번 똑같은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을 늘 하게 된다. 나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해 주길 기대했던 사람과의 대화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나이라는 것에 얽매이고 싶지 않을수록 더욱 나이에 대해 생각하고 나이 정보를 인식하는 데 민감 해 지게 된다. 내가 사람과의 만남에서 나이 아는 것을 불필요하게 여기는 것은 매 순간 달라지는 사회적 나이와 그에 따른 사회적 역할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못된 버릇이 내게도 당연히 스며있으니 그런 상황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나이를 공개하지 말자고 하는 제안 자체가 내 나이를 부끄러워하거나 민망해하는 심리로 단순하게 해석이 되고 만다. 십 년 전에나 지금에나 나는 ‘나이는 어려서 좋을 것도 없고 많아서 나쁠 것도 없는 중립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동안이라는 말이 왜 그렇게 칭찬인지 잘 모르겠는’ 사람이었지만, 삼십 대 중반이 된 지금 내가 추구해 온 이 가치는 나이라는 뻔한 프레임에 갇혀 내 의도와는 매우 먼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러다 보면 상대방과 나의 대화는 ‘우리가 나이를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하고 이야기해 볼 좋은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만다. 내가 누군가를 나이로 규정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써야만 했다.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면서 시간을 들여 이렇게 나이에 대한 긴 글을 써 놓는 것은 모순적이지만 내가 나이의 사회적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여 왔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는 말을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정리 해 두고 싶었다. 물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앞으로 나이로 평가받을 일이 더 많아지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이 글을 내밀어 나를 변호하는 우스운 일은 아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글의 가장 크고 꾸준한 독자인 내가 때때로 이 글을 읽는 것은 내 삶에 큰 의미가 있다. 십 년 전의 나 자신과 비교했을 때 나이에 대한 생각이 변하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이 글이 앞으로의 내 생각과 행동이 가야 할 길을 정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면서 여기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을 때는 그 논리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설득할 수 있는지 질문하는 역할 또한 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 더욱 현명해질지도 모른다. 반대로 판단력이 지금보다 더 흐려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변화가 내 선택과 노력의 결과일 뿐 나이를 먹어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다. 모든 것은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 경험에 비추어 나이의 역할을 크게 조명하는 편협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나이가 궁금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진짜 대화와 진짜 관계가 시작된다. 그 사람을 이해하는 데 있어 나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너무나 작고 하찮은 정보일 뿐이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논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