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매일단어

논쟁

by 담쟁이

격주로 하는 독서모임에서 이번 주에 다뤘던 책은 유명한 심리실험들을 모아서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모임 며칠 전 미리 올라온 발제 내용 중 ‘키티 제노비스 사건’과 최근 전 국민의 공분을 샀던 디지털 성착취 (a.k.a. N번방 사건) 관련자들을 비교하는 질문이 눈길을 끌었다. 개인적 관심사도 높은 편이지만 업무적으로도 관련된 내용을 다뤘던 적이 있기 때문에 어쩌면 눈길을 끌었다는 말 보다 의아함과 분노 그 사이 어디쯤의 감정이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수도 있다.

한 여성에 대한 강간살해 현장을 목격한 38명의 사람들이 피해자가 숨질 때까지 아무도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60년대 당시 미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던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책임 분산’과 ‘방관자 효과’의 예시로 인용되는 사건이지만 이 사건이 사회심리학의 연구주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38명의 목격자들에게 도의적 책임 외에 어떤 법적 책임을 묻거나 처벌을 내릴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도움을 주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기대했고, 그래서 궁금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 이 상황이 어떻기에 이 사람들은 방관자가 되었는지, 그들의 양심은 어쩌다 그렇게까지 둔마 될 수 있었는지.

우리 독서모임 발제자의 요지는 한 사람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하면서 침묵하고 말았던 38명과, 최근 조주빈, 박사, 갓갓 등이 연루된 디지털 성착취 사건의 이용자들을 ‘방관자’라는 측면에서 동일선상에 놓고, 이들이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무엇일까 이야기 나누어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두 사건의 연루자들이 동일선상에 놓일 수 없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의 동기와 자발성의 정도를 조금만 생각해 보면 자명하다.

디지털 성착취물 구매자들은 최소 수십만 원, 많게는 백만 원 이상의 현금성 대가를 지불하고 그 방에 입장했고, 보도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가상화폐 거래까지 요구하는 다중 인증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모든 걸 간편하고 단순하게 하지 않으면 안 팔린다는 게 상식으로 통하는 연령대에서, 그 귀찮은 과정을 감수하는 것은 적극적인 의지라고 하는 것 외에 설명할 다른 방법이 없다. 제노비스 사건의 38명은 단지 밤에 집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테라스에 나와본 것만으로 이 사건에 연루되었지만 텔레그램 방에 들어있었다는 추산 26만 명의 가해자들은 분명히 이 일에 참여하지 않을 선택권이 있었고, 그 선택의 기로에서 이 범죄에 가담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다.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성인으로서 나의 소비가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전혀 모른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거나 멍청이 둘 중 하나일 터, 그 방에 들어간 개인적 동기가 어떻든지 간에 이 거대한 산업의 소비자이자 생산자고, 법적 용어로는 피의자이자 가해자임을 이해한다면 발제문 속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이유가 풀린다. 텔레그램 성착취물을 본 사람들은 절대로 방관자일 수 없고, 그들을 방관자로 인정하는 데 머무는 것은 결국 피해자 입장은 철저히 배제한 채 죄의 경중을 논하는 가해자 관점이기 때문이다.

사실 질문 자체가 실망스럽긴 했지만 모임 전까지 그 질문을 한 것 자체로 편견을 가지거나 그에게 화가 나거나 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지난 8개월여의 경험을 통해 독서모임의 순기능을 누구보다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제에 대해 건강하게 말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이 두 사건이 비교 가능한 성질의 것이 아님을 모두 이해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껏 많은 사회문제나 사상, 미래의 전망 등에 대해 생산적 토론이 우리 모임에서 이루어졌고, 그 가운데 이성과 합리의 기수로 선 것만 같은 그였으니 이게 뭐 대수일까 싶었다.

과연 어떤 논리로 그가 화두를 열지, 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어떨지 궁금했던 나는 초반에는 한 마디도 없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만 했지만, “솔직히 옆에서 얘도 들어가고, 쟤도 들어가고, 친한 사람들 많이 들어가면 나도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라는 말이 나왔을 때쯤 그보다 더한 이야기는 도저히 듣고 싶지가 않아서 침묵하고 있던 입을 뗐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말을 오해하고 있다는 각자의 이해 속에 이어진 대화는 합의점에 도달할 수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임 다른 멤버들 중 몇몇으로부터 나온 ‘동일 선상의 비교가 어렵다’는 말에 그는 “무슨 말인지 아는데, 나는 ‘방관자’라는 공통점에 착안한 것이다”라는 논리로 대응했고, 나는 몇 차례고 반복해서 그들은 방관자가 아니라서 공통점이 없다는 말을 전달하려 애썼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의미를 전달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내가 감정적으로 격해지고 있다고 보는 듯했지만, 그 격정이 본인 때문에 답답해서란 사실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 모임의 실질적 리더로서 “그러니까 ‘여기 있는 우리’는 그 N번방이 범죄라고 생각할 만큼 상식 수준의 사람인 거 같고요, 저는 그런 행동이 왜 나왔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 좀 더 얘기를 해봤으면 좋겠다는 거예요.”라는 유려한 말로 분위기를 정돈하고 자신의 논리 오류에 대한 지적을 피하고자 했다. 물론 위에 언급한 내용 외에도 법과 제도 개선 등을 논하는 논리 속에서 성착취 범죄를 보는 그의 관점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저 말은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한 정리 발언이었고, 그마저도 속이 다 보이는 태세 전환이었지만 나도 싸움을 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그러나 모임이 끝나고 오래도록 나는 찜찜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발제문을 처음 봤을 때부터 갸우뚱했던 마음은, 가만히 오고 가는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몹시 불편해졌고, 이 대화 끝에 합의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심장이 쿵쿵 뛰기까지 했다. 그건, 지금 내 눈 앞에서 조금도 자기 뜻을 굽힐 생각 없이 똑똑한 말을 하고 있는 이 남자가 지극히 보통인 대한민국 남성이고, 어쩌면 독서모임을 통해 이런 얘길 꺼낼 만큼이나 보통 이상의 사회의식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내가 경험한 이 사람은 페미니즘이 상식이라는 생각에 동의하고, 사회 진보의 역사와 그 가능성을 믿는 사람이고, 본인 스스로도 진보적 사회운동에서 계몽 혹은 타도의 대상이 되는 부류와 자신을 분리 해 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자신이 가진 생각의 기저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인지 그는 끝내 이 대화를 '진의를 오해'한 해프닝으로 마무리하려고만 했다. 종종 주변인들과 사회이슈에 대한 논의를 한다는 그로서는 지금 어딘가에서 이 에피소드를 들어 열변을 펼치고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하지만 자칭 '상식 수준의 사람'인 그에게서 내가 본 것은, 자신이 가진 상식 그 자체에 오류가 없음을 전제로 하는 오류였다. 이제껏 그를 상대로 논의와 합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결정한 주제에 한정된 것이었을 뿐, 그 밖의 것에 대한 그의 유연성은 너무나 적었다. 그리고 그가 소위 사회의식이 높고 똑똑하며 여러 사람을 자기 논리로 설득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는 점은 그러한 그의 행동을 너무나 잘 설명해주었다. 숨겨지지도 않고 가려지지도 않는 생각의 근간을 지적하는 것이 그래서 그는 불편하고, 억울했고, 불필요한 대화로 느껴졌을 것이다. 당장 이 공격만 피한다면 대개 자신은 지지받는 입장에 서니까.

한 이슈에 대한 의견의 스펙트럼 상에서 그와 내가 반대쪽 극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이전에도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지만, 그가 자기 의견을 말할 때 '당연히'라는 부사를 자주 쓰는 것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줄 상상도 못 했다'는 말을 했던 것도 이제야 의미 있게 들리기 시작한다. 언제나 나와는 다른 관점을 제시해 주는 그의 생각이 참 신선하고 모임에도 좋은 역동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도 호감의 척도를 1부터 10까지로 놓는다면 6 정도의 호감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너무나 자기 확신에 찬 그의 소통방식 앞에서 내쪽으로 열린 문도 쉽게 닫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조금 더 유연한 사람이었다면 나도 좀 더 노력해볼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을 느끼며 그에 대한 호감 척도를 4 정도로 내려놓는다. 그리고 아직도 기분을 찜찜하게 하는 이 에피소드를 두 가지 교훈으로 정리한다.

첫째, 성착취 범죄에 있어서 '보통사람'의 인식 수준은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낮으며, 완고하므로 그 의식을 높이고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은 아주 먼 길이다.

둘째, 똑똑하고 바른말 잘한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들일수록 유연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고, 내가 가진 상식이 완전무결하다는 생각으로 논쟁을 거부하는 순간 진보는 끝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틀린 것’을 ‘다른 것’이라며 덮으려는 시도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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