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쟁이 Aug 11. 2022

귀하는 만성적인 폐기 기능 저하로 재활이 필요합니다

병은 고칠 수 있지만 장애는 평생 안고 가는 거라며

몇 해 전 미니멀리즘이라는 삶의 방식이 소개되더니 정리 전문가를 내세운 책이나 쇼 프로가 국내외에 유행처럼 번졌다. 때마침 등장한 코로나19로 강제 집돌이와 집순이가 된 사람들은 저마다 집 꾸미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원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원래의 공간을 정리하고 비워내는 사람들의 꿀팁과 자랑들이 눈에 띄게 많아진 것을 생각해보면 '당근 마켓'과 '오늘의 집'의 큰 성공이 이러한 맥락 안에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신정과 구정 사이 언젠가쯤 신년 다짐을 하나 추가했다. 딱히 일 년짜리 계획일 필요는 없지만 원래 안 하던 일을 시작할 때는 거창한 계기나 다짐이 필요한 법, 연간 지속적인 동기부여와 모니터링을 위한 나름의 장치였다. 원래 온라인 장보기를 해도 배송 전에는 품목 추가가 가능하니까.


계기는 당근 마켓으로 소소한 용돈벌이를 하는 지인 여럿의 간증이었다. 청소하느라 집 안 구석구석을 뒤져보니 꽤 쓸만한 물건이 많이 나오더라며, 버리는 것도 돈이지 싶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올린 물건이 금방 주인을 찾았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물건 쌓아두기로는 부엉이 집에 비견할 내 방이니까 나도 모르는 보물들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다. 이참에 청소도 해 보자며 발아래 쌓여있는 이름 모를 박스들과 책장 꼭대기에 올려진 의문의 보자기를 끄집어 내렸다. 이렇게 보면 유물, 저렇게 보면 쓰레기인 그 물건들의 목록을 굳이 나열하자면 필기가 빼곡한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그때 좋아했던 문학 선생님이 주신 교사용 참고서, 초중고등학교 중간 기말 성적표와 꼬리표, 제목도 생소한 대만 드라마가 '구워져' 있는 CD, 곰신일 때 쓰려고 잔뜩 사 둔 편지지랑 철 지난 캐릭터 스티커, 조금 더 멀리 거슬러 가면 친구랑 주고받으며 쓰던 우정 일기장, 더 멀리 가면 H.O.T. 오빠들이 출연한 라디오 방송 녹음테이프... 이상은 최대한 덜 쓰레기 같아 보이는 것만 엄선한 목록이었다.


오랜만에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 '방구석' 문을 열고 들여다볼 때마다 '병적으로 더럽다' 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으며 화를 내던 엄마가. 그때마다 수긍하며 '알았어, 치울게'로 입막음했지만 이제야 나는 엄마가 틀렸음을 깨닫는다. 병은 고칠 수 있지만 장애는 평생 안고 가는 거랬는데 그렇다면 이건 장애의 영역에 가까울 터, 그저 나는 버리는 데 남들보다 좀 더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고, 사는 데 지장 없을 만큼만 그 기능을 회복시키면 될 일이다. 그때 두 가지 마음이 생겼다. 만성적인 기능 저하를 보이는 나의 '폐기력'을 높이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할 마음, 그리고 나를 만들어온 삶의 증거가 내가 모아 온 물건이라면 버리는 행위를 통해 다른 모습의 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기대의 마음도.


그렇게 시작한 폐기 기능 재활 프로젝트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앞으로 52주간, 매주 1개의 물품을 선정해서 처분한다.

둘째, 선정한 물품에 대한 추억과 처분하기로 한 이유에 관해 글을 쓴다.

셋째, 폐기를 기본으로 하되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배송료만 받고 제공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