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쟁이 Feb 05. 2023

인생은 상상할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간다.

국제개발협력 프로젝트 기획 및 실행관리 참고 서적



국제개발협력(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이 누군가에게는 참 생소한 개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이 업계로 발을 들여놓은 지 수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초중고대학교 친구들을 제외하면 그때까지 내가 속해있던 사회집단은 종교기반의 공동체 또는 사회복지와 개발협력을 포함하는 비영리 기반의 공동체, 크게 두 종류로 나눠져 있었고 그 둘의 교집합도 꽤 큰 비중으로 존재했다.


개발협력 업계의 두 번째 직장으로 옮길 무렵에 가입한 춤 동호회에는 이제껏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다양한 직종과 배경의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남자 구성원들 중 많은 수가 판교와 가산을 기반으로 일하는 IT 업계 종사자였다. 말이 쉬워 다 같은 IT 종사자지 내가 하나하나 이해도 못할 정도로 다양한 직종의 통칭이며, 그중 소프트웨어나 게임을 프로그래밍하거나 설계하는 사람들을 개발자라고 한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만날 때마다 자기소개를 해야 했던 동호회 초기에는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국제개발이요."라는 대답을 하곤 했지만 그 뒤로 "아, 개발자시구나."라거나 "국제 개발은 뭐예요?"라는 대화가 이어지는 상황이 잦아지면서 내가 일하는 분야가 생각보다 보편적이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그제야 나의 표준답변을 "비영리 단체에서 일해요."로 바꿨다.

 

우리 엄마아빠조차 수년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국제개발협력은 '공부는 정말 끔찍하게 싫지만 생각보다 퍼포먼스가 좋아서 대학까지 간' 나를 꾸역꾸역 대학원까지 밀고 간 이유였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몇 년 이상의 먼 미래를 바라보며 뭔가를 준비해보게 한 유일한 동기였다. 첫 직장을 정할 때도 그 조직이 하는 일과 일하는 방식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지원했고, 그 직장을 그만두었던 것도, 두 번째 직장이 힘들었던 것도, 세 번째 직장으로 옮겨왔던 것 까지도 모두 다른 이유보다는 개발협력이라는 업에 대한 애정과, '다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의 연장선상에 있었음을 지금 더욱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보통 자기 전에 매일 읽는 책을 침대 머리맡에 두는 경우가 흔하지만 나는 독특하게도 아끼지만 자주 손이 갈 필요가 없는 것들을 그 자리에 둔다. 폐기기능재활 노트를 쓰기로 하면서 가장 먼저 눈길이 간 그 책장에서 이 책들을 꺼냈다.


<국제개발 협력사업 기획과정>, <프로젝트 관리와 평가: 프로젝트 기획, 모니터링 및 평가 방법론>  


처음으로 일을 시작했던 곳은 개발협력 단체라기보다 개발협력 사업을 비즈니스의 일부로 가져가는 공정무역 단체이자 사회적 기업이었다. 모두가 제품을 만들고 고객을 만나며 돈을 벌고 있는 가운데서 번 돈을 쓰기만 하는데도 기관의 미션에 부합하는 '목적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기에 나름의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며 신나게 일을 배우던 때였다. 하지만 대안적 형태의 개발 단체에서 일을 시작했던 나에게 주류 개발협력의 방식과 도구를 체계적으로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쉽게 말하면 표준어로 소통해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아는 언어의 전부는 사투리인 것과 같았다. 다행히 외교부 산하의 공공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서는 중소규모의 민간단체에게 도움이 되는 많은 교육훈련과 네트워킹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당시에 나는 마치 소녀가장처럼 '우리 기관의 목적사업을 궤도 위에 올려놓을 사람은 나뿐이다'라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다. 이 책은 그 개발협력의 언어를 처음 배운 교재였다.


사업 계획이나 관리라는 게 아주 별세계 말도 아니고 그저 세상만사에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논리적인 생각을 글로 옮겨놓는 것뿐이지만, 특정한 집단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배우는 것은 지식습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내부에서 시키는 사람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뭔가 해냈다는 자기 효능감을 얻은 나는 기관에서 유례없던 규모의 펀딩을 받아 역시 이전에 없었던 형태의 개발협력 프로젝트를 해냈고, 이 기관은 그 성공을 기반으로 '주류 개발의 용어'를 사용한 개발협력 사업의 실행과 발전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이후에 다른 개발협력 기관으로 이직을 하고 난 뒤 알았다. 내 첫 직장보다 조금이라도 더 규모를 갖춘 기관에서는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해냈던 그 정도 규모의 프로젝트에도 여러 사람이 각기 다른 역할을 맡아 서로 협력하며 과업을 수행한다는 걸. 나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몰라서 그랬겠지만 알았다 해도 딱히 대안도 없었다.


지금 다시 본다면 부끄러울 정도로 어설픔 투성이겠지만 사회인이 되고 나서 첫 번째로 완수했던 프로젝트는 그 뒤로 이어진 여러 결과를 통해 내 인생에 분명한 흔적을 남겼으니까, 이 책은 그 중요한 프로젝트를 만들어낸 결정적 자료에 해당한다. 그 뒤로는 딱히 펼쳐보지도 않아서 큰 도움을 받은 적도 없지만, 여러 가지 업무를 옮겨 다니며 이제 더 이상 현장사업과는 관련이 없는 일을 하게 되면서도 나는 이 책을 책장에 두며 나는 국제개발을 하는 사람이고 언제나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 번째 직장에서 6년여간 같은 업무를 하다가 내 발로 걸어 나가 전혀 다른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다. 공부한 세월까지 더하면 12년간 결이 같은 일을 했으니 인생의 분기점이라 할만한 큰 사건이었지만 새로운 보직에서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하면서도 이 팀에서 한시적인 경험을 마치고 나면 내 학문적 배경과 경력의 본원에서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것이 당연하고, 그게 개인과 조직을 위하는 일이라는 데 의심이 없었다. 그런데 한시적이라고 생각했던 그 보직에서 올해 초 다시 이동해 인생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직무를 하게 되었고 지난 한 달간 경력경로(career path)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지난 한 달간은 영감을 주는 몇몇 동료들과 밥을 먹으며 나의 이런 고민과 감정을 털어놓았다. K는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지금 원하는 지점에서 벗어난 걸 인지하는 것만으로 훌륭하다며 그 지점을 계속해서 생각한다면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지금 주어진 것을 열심히 해 보라고 했다. 지금 내게 맡겨진 업무가 직장생활을 계속하는 한 앞으로 더욱 필요할 역량과 관계있으니까 제법 납득이 갔다. 번아웃으로 오랜 공백기를 갖고 돌아와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일하고 있다는 H는 100년이 넘게 살아야 하는 인생인데 길어야 고작 30년 정도의 직장생활이라 생각하면 커리어 패스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내게 되물었다. 휴직 전엔 걱정될 정도로 열의 있게 일하던 사람이었는데 이 정도 생각의 전환이 놀라웠다.


둘 중 어느 것도 명확한 답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곱씹게 되는 동료들의 애정 어린 말을 마음속에 두면서, 신년 첫 업무 출장을 갔다. 살면서 성남 판교는 한국 국제협력단 방문으로만 오는 곳인 줄 알았는데 전사 도입하는 시스템 교육을 받기 위해 IT 기업에 오다니, 내가 애쓰는 것과 상관없이 인생은 상상할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간다. 판교에서 퇴근하고 같은 날 저녁에 이 책 두 권을 꺼내서 종이 쓰레기로 버렸다. 어떤 대단한 결단이나 감정 때문이 아니라 그저 앞으로는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이성적인 판단에서였다. 어차피 지난 모든 경험은 내 안에 있고, 앞으로 도움받을 자료는 모두 전자문서 형태겠지. 책은 버렸지만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 국제개발협력(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 개발도상국의 빈곤퇴치와 경제·사회 개발을 지원하는 공공·민간 부문의 모든 활동을 포괄하는, 개발을 실현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광범위한 협력이며, 대다수 선진공여국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개념. (대한민국 외교부)

매거진의 이전글 귀하는 만성적인 폐기 기능 저하로 재활이 필요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