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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Feb 18. 2023

못하겠다 싶을 때는 하지 마

경고하는 이유를 여행 마칠 때까지 제발 직접 체험할 수 없길 바랐다

첫인상 한 번 쌀쌀하네


나와 한 시간 정도 차이를 두고 반석과 살별이 공항에 도착했다. 첫 모임 이후 한 달 반만이었으니 만나자마자 조금 어색했던 건 나뿐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혹시 아니었다면 우리 팀에서 내가 가장 내향형인 걸로. 하지만 그 어색함은 아이슬란드에서의 첫 미션 수행 -렌터카 업체 만나기- 덕에 곧 날아갔다. 내가 그린 그림은 조금 먼저 공항에 도착한 내가 먼저 업체에 연락을 해서 대기시간을 줄이고, 차량 인수 절차에 넉넉히 한 시간 잡아도 레이캬비크 시내 도착하면 오후 다섯 시 정도 될 테니 한 바퀴 빙 둘러서 숙소에 가면 저녁 먹기 딱 좋겠다였는데, 결론적으로 숙소 도착 시간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 과정은 얼음땅에 처음 떨어진 우리에게 별로 친절하지 않았다.


외국에 도착하자마자 렌트를 하는 경험은 운전을 안 하는 나는 물론이고 다른 일행들도 처음이었기에, 한국에서 이미 꼼꼼히 비교해서 차량을 예약하고 픽업 방법까지 체크했다. 하라는 대로 공항에 도착해서 전화를 걸었는데 몇십 분 째 사무실은 자동응답 중이고 우리를 데리러 온 직원도 보이지 않는 거였다. 공항에 있는 Hertz, AVIS, Budget 등 메이저 업체 카운터로 가서 물어보니 '확실하진 않지만' 공항 내에 카운터가 없는 업체들은 예약자 비행기 도착시간에 맞춰 네임카드를 들고 출국장에 서 있거나, 혹시 아니더라도 한 시간에 한 번씩은 공항에 나타날 거라며 바깥에 업체 픽업차량이 나타나는지 잘 보라고 한다. 요약하자면 '올 때까지 기다리면 결국 온다'는 말을 듣고, 넷이 쪼르륵 앉아 수다 떨며 몇 번의 전화통화를 더 시도하다 보니 갑자기 전화 연결이 됐다. 우리가 예약한 픽업시간은 네 시였는데, 태연하게 네 시가 넘어 전화를 받은 전화기 건너편의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예약자명이 뭔지 묻지도 않고 지금 공항이면 이십 분 정도 더 기다리라며 오렌지색 인포메이션 데스크와 ATM 기 사이에 서있으라고만 말하고 전화를 끊는다. 뭐가 이렇게 냉랭한가 싶었지만 생각해 보면 이 나라에 처음 온 외국인의 긴장감을 이해하고 해소해 주는 건 이 사람의 업무범위에 미치지 않는다. 친절도 다 문화 상대적인 개념이니까, 그래, 기분 나빠하기에는 이 나라 사람의 '기본 가정'에 대한 이해가 내겐 아직 없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판단을 보류해 보기로 했다.

 

약속한 이십 분이 더 지나가나 싶을 때쯤 딱 한 개뿐인 공항 출입구로 서두르는 기색 하나 없는 키 큰 북유럽 남자가 들어오더니 우리가 예약한 업체 포함 군소 렌터카회사 로고가 가득 들어있는 큰 팻말을 들고 선다. 정확히 오렌지색 인포메이션 데스크와 ATM기 사이. 고객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다는 듯 누군가 찾을 생각도 없이 가만히만 서 있는 그 사람에게 가서 예약 정보를 말하니 무표정하게 확인하고 기계처럼 우리를 인도해서 큰 밴에 태운다. 늦은 걸 사과할 마음도, 얼마나 늦었는지에 대한 인지도 없어 보여서 우리도 정도는 달랐지만 다들 아주 유쾌하진 않은 눈치였다. '이게 우리에겐 아이슬란드의 첫인상인데 정말 이럴 거야?' 아까 미뤄뒀던 무언가가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부정적인 말을 내가 가장 먼저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다.


공항에서 차량 픽업 장소로 가는 동안 완전히는 아니었지만 조금은 맘이 풀린 건 눈 쌓인 광야 같은 도로 풍경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케플라비크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빠르게 건물들로부터 멀어지더니 어디 으슥한 데로 끌고 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차 지나간 흔적이 드문 도로에 진입했다. 찻길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지만 양쪽 도로변에는 뭐가 있었다 해도 눈에 파묻혀 있을 것처럼 건물 한채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에 그저 흰 눈만 두텁게 쌓여있었다. 이미 하늘은 어두운 밤이었지만 가로등 불빛이 눈밭에 반사되어 어둡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바퀴가 내 허리춤까지 오는 사륜구동 차로 앞뒤옆이 다 눈으로 막힌 것 같은 길을 요리조리 피하기도 하고 덜컹덜컹 지나가기도 하는 걸 보니 눈이 그친 게 아니었더라면 공항에서 훨씬 더 오래 기다렸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많이 올 땐 치우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쌓인다던데 그 상황이라면 별 수 있겠나, 그래도 오늘은 눈이 안 와서 정말 다행이야. 짜증이 갑자기 안도로 변했다.


십오 분쯤 달려 컨테이너와 창고가 드문드문 보이는 길 위에 가건물처럼 지어진 사무실로 들어갔다. 아이슬란드에 직영 사무소를 두지 않은 여러 업체의 에이전시 같은 느낌이었다. 서비스직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그 어떤 친절도 보여줄 마음이 없다는 듯 계약과 운전자 등록을 진행하던 무뚝뚝한 직원이 처음으로 웃은 건 결제를 하는 단계에서 반석이 내민 신용카드 위 커다란 스마일 그림을 봤을 때였다. 아니 웃으며 인사 한 번을 안 해주더니 스마일이 귀엽다고 웃어? 어이가 없었지만 '다 필요 없고 귀여우면 땡'이 북유럽에서도 통하는 만고불변의 진리임을 확인하며 곁에 있던 나도 긴장이 확 풀어졌다. 그의 두 번째 웃음은 서명을 하는 반석의 이름을 보며 '한국 사람 이름은 항상 세 음절'이라며 흥미로워할 때 볼 수 있었다. 그래, 사실은 귀여운 걸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은 평범한 사람인데 다만 일하기가 싫었을 뿐이군. 자기가 관심 있는 거 말할 때는 참 우호적인데 주제가 바뀌면 차가운 표정으로 단번에 돌아가는 게 놀라웠다.



대체 아이슬란드에서 운전하는 게 얼마나 힘들기에   


중소 업체에서 차량을 빌려서 오가는 시간 고생은 좀 했지만 결국 메이저 업체와 비교할 수 없는 저렴한 금액으로 렌트를 했다. 엿새동안 차량 렌트비와 풀 커버리지 보험은 한화 청구비용 기준으로 66만 원 정도, 여행 마친 뒤 모든 주유비와 주차비를 합쳐도 총 95만 원 정도니까 한 사람 당 비용으로 나누면 교통비에 24만 원 정도, 매일 4만원 정도인 셈이다. 물론 운전자의 노고를 계산하지 않은 비용이긴 하지만 교통비가 포함된 각종 투어비용이나 광역 대중교통이 거의 없다시피 한(국토 순환하는 링로드를 따라 하루 한 대 정도 버스가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고려대상이 아니었기에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다.) 아이슬란드에서 여행의 편의성을 생각했을 때 가장 비용효율적인 선택이었다. 특히 일조시간이 극히 짧은 겨울에 단기로 여행했던 우리는 시간 절약 차원에서도 렌트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는데, 상대적으로 여행기간이 길고 여름에 여행을 한다고 해도,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고 고생하는 게 중요해서 꼭 일정에 넣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무조건 렌트를 하는 걸 추천한다. 사실 우리는 운전이 워낙 험하단 이야길 들어서 초반에 '렌트 vs 투어'를 고민하기도 했는데, 여행이 끝난 시점에 돌아보니 투어는 렌트를 했을 때 보다 절반밖에 못 보고 고생은 몇 배로 할게 분명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고생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과 맞바꾸기에는 아이슬란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렌트비 다섯 배가 넘는 40만 크로나를 보증금으로 긁어버린다. 사주에 재물이 많다던 반석의 카드라 월말에도 한도가 400만 원 넘게 남아있어서 다행. 렌트할 땐 카드한도를 빵빵히!


수속이 거의 끝나갈 때쯤 계약서 한 부를 프린트해 주던 그 무뚝뚝이는 지금까지 보다 한층 더 심각한 표정으로 강조했다.


"지금은 크리스마스 전후로 한 공휴일 기간이야. 그 말은, 너희가 운전하다가 도로 한가운데서 무슨 일이 난다고 해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평소보다 굉장히 늦게 도착할 수 있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정말 궁서체로 이야기하는 건데, 운전 못하겠다 싶을 때는 하지 마. (When you think that you can't drive, don't drive)"


책상 한편에 붙여진 24시간 도로 지원 비상전화번호를 사진으로 찍어가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니까 괜히 하는 말이 아닌 게 느껴졌다. 오기 전에 찾아본 수많은 유투버들의 경고와 꽃보다 청춘 아이슬란드 편에서 주행 중 운전석 창문이 깨지고, 현지인 가이드를 대동해서 폭설을 뚫고 운전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와, 운전 못해서 다행인 건가. 과연 반석과 노라는 악천후 속에서도 안전운전을 할 역량이 있는 걸까. 우리는 이제 운명공동체니까 목숨을 맡길 수밖에. 아빠가 늘 요구하는 '같이 가는 친구네 부모님 전화번호'를 이번만큼은 주고 올 걸 그랬나.


여러 생각을 하며 차량을 확인하러 나왔는데 아무리 봐도 우리가 예약한 차량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엉뚱한 현대 투싼에 시동을 걸고 있는 무뚝뚝이에게 '이거 우리가 예약한 차량 아닌데?'라고 말하자 이제까지 본 적 없는 활짝 핀 웃음을 보이는 그. "이거 너네 (나라) 차야, 한국차 되게 좋아. 야, 너희 나라 차 못 믿는 거야?(This is YOUR country's car! Korean car is very good!! Come on, you don't trust your car?)" 뭐라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네. 그래도 뭔가 다른 거 아니냐, 우리가 예약한 차는 지금 없냐니까 거의 비슷하다며 반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시늉을 하는 무뚝뚝이는 이제야 넉살 좋은 영업/서비스 업계 사람 같아보았다. 예약 바우처를 보니 차량명 'Suzuki Gran Vitara 4X4' 옆에 아주 조그만 글씨로 'or Similar'라고 쓰여있긴 했다. 나는 운전이고 차량이고 전혀 모르지만 주 운전자인 반석이 '운전해 본 적이 없는 차라서 유튜브 영상도 찾아보고 했었는데 현대차라면 오히려 좋다'라고 말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짐을 실었다. 시간은 벌써 다섯 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따순 환대의 저녁식탁


공항에서 레이캬비크 시내까지는 삼십 분이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인구의 삼분의 일 이상이 레이캬비크와 그 주변에 밀집해서 산다더니 도시에 가까워질수록 이맘때 여느 서양 나라들처럼 반짝반짝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건물 곳곳에 보였다. 바깥은 영하의 날씨였지만 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공항에서 렌터카 픽업하기까지 제대로 못 받았던 환영을 이제야 받는 느낌이었다. 어젯밤 혼자서 시내 숙소에 묵었던 노라의 짐을 픽업해서 드디어 첫날 숙소에 도착했다. 저녁식사를 한창 준비하고 있던 걸로 보이는 호스트님이 우리를 맞아들이시면서 한국도 겨울이 춥냐면서 아이슬란드의 겨울은 춥지만 늘 이 정도는 아니라며 요 며칠 눈도 기온도 일상적인 수준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묵는 지하층에 온도도 올려두고 미리 이것저것 신경 써서 세팅해 두신게 보였다.



오래전부터 와보고 싶었던 아이슬란드에 드디어 왔는데 일정이 짧아서 벌써부터 아쉽다고 하자 호스트 아주머니는 갑자기 언제까지 있을 거고 어디까지 갈 거냐면서 매일의 일정을 체크하시더니 우리의 일일 동선의 적정성과 요쿨살론까지만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점에 일단 안심하시는 눈치였다. 그 정도면 무리하지 않고 괜찮은 일정이라며, 다만 오로라를 보러 생각 없이 달려간다든지 무모한 짓을 절대 해서는 된다고 한 번 더 단속하셨다. 지난주에도 비크에서 오로라를 보러 오프로드로 달렸다가 두 명이 죽었다는 말과 함께. 아까 그 렌터카 무뚝뚝이의 진지한 표정이 다시 한번 떠오르면서, 현지인이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경고하는 이유를 여행 마칠 때까지 제발 직접 체험할 수 없길 바랐다.  


내일도 아침 떠나려면 하룻저녁 잠시 묵는 숙소지만, 단체여행하기 좋은 상태로 각자의 캐리어를 재정비하기 위해 짐을 풀었다. 숙소에서 여러 끼 해결해야 하는 우리의 식량이 반석 가방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첫날이지만 패기 넘치게 라면 네 개를 끓이고 스팸도 아끼지 않고 숭덩숭덩 넣었다. 나는 평소에 라면도 잘 안 먹고, 해외로 한 달씩 출장을 가도 한국음식 먹고 싶어 안달 나는 일이 없는데 끓인 사람 솜씨인지 누가 해 준 음식은 다 그런 건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세 명 이상의 사람과 팀을 이뤄 국외 여행을 해본 게 언제 적이었나 생각해 보니 칠 년도 더 된 일이다. 일행도 국가도 정말 다를뿐더러 나도 그때와 같지 않을 테니 새로움으로 가득 찬 이 상황이 또 어떤 재미있는 일을 가져올지 너무 기대가 됐다. 이렇게 한 식탁에서 라면을 나눠먹는 여행에서 경험하는 건 내가 이전에 경험한 적 없는 케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극의 나라에 오면서 여벌옷 대신 우리의 식량만 가득 채워온 반석의 짐가방(의 일부). 그는 추웠겠지만 우리는 덕분에 내내 따뜻하고 배불렀다. (Photo by 반석)


한참 여유롭게 저녁을 먹다가 말고 혹시 오로라 있나 오늘부터 잘 살펴보자고, 아니면 별이라도 보자며 밖으로 튀어나갔는데 마침 저녁식사를 마친 호스트님이 직접 요리한 칠면조와 그레이비소스, 버터구이 감자와 파인애플, 옥수수를 한 접시나 가져다주셨다. 이미 배는 다 찼지만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그 요리는 아이슬란드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받은 환대라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청 쌀쌀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따뜻한 곳일지도 몰라. 얼음이 가득하니까 서로 따뜻하게 굴지 않으면 살 수 없을지도. 차가웠던 모든 첫인상이 츤데레의 은근한 애정처럼 느껴졌다. 빨리 좀 더 알아가고 싶다, 아이슬란드.


거하게 저녁을 먹고 뒤늦게 나눠주신 저녁을 또 먹었다. 배불러서 다 못 먹은 칠면조와 그레이비는 다음날 점심으로 만들어 남김없이 먹었다. 따순 환대니까. (Photo by 혜빈)



[여행 전 또는 여행 중 보면 좋은 사이트]

* 안전정보 https://safetravel.is/ (앱 검색 safetravel - iceland)
* 날씨정보 http://www.en.vedur.is(앱 검색 vedur)
* 도로상황 https://www.road.is
* 24시간 도로 지원 https://24ra.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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