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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Mar 20. 2023

우리 지구가 크고 있어요: 싱벨리어 국립공원

싱벨리어의 대륙판 경계도, 그로 인해 아이슬란드의 영토도 매년 확장한다

골든 서클을 향해서


아이슬란드에서의 첫 밤을 보내고 어제와 동일한 시간에 눈을 떴다. 십 년이 넘는 나인투식스 직장생활은 내게 세계 어느 곳에서도 아홉 시 출근이 가능한 시간에 눈을 뜰 수 있는 시차 초월 능력과, 항공기 안에서 잠들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함께 주었다. 덕분에 밤낮이 정반대인 나라에 가더라도 도착 당일 밤잠을 자고 일어나면 바로 시차 문제가 해결되는 특기를 갖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해외여행에 최적화된 지구인이라 할 수 있다. 뚝딱뚝딱 아침 먹고 점심거리 만들어 짐 싸들고 나오니 바깥은 어젯밤 숙소에 들어왔을 때랑 밝기가 비슷했다. 새벽 어스름 근처에도 못 간 한밤중 같은데 시간은 벌써 아침 열 시가 넘었다니 한겨울 일조시간이 네 시간이란 말이 실감 났다.


오늘 돌아보기로 한 주요 관광지는 싱벨리어 Thingvellir, 게이시르 Geysir, 굴포스 Gulfoss인데 이 세 지점을 이은 선이 원에 가깝다고 해서 골든서클 Golden Cirlcle이라고 한다. 도시와 비교적 가까우면서도 아이슬란드 지질환경의 에센스를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만약 이 나라에서 단 하루만 보낼 수 있다면 가장 먼저 추천할 곳은 골든서클이다. 그중에서도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싱벨리어 국립공원은 레이캬비크에서 북동쪽으로 45킬로미터쯤 떨어져 있고, 북아메리카판과 유라시아판의 경계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 같아


도시를 벗어나자 나타나는 쭉 뻗은 도로는 광활하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여전히 동이 트지 않았지만 길 옆으로 버티고 선 설산들과 눈 덮인 평야가 빛을 반사해 환한 느낌이었다. 나무는 한그루도 없는지 매끈한 설산이 주는 위압감이 엄청났다. 달리다 보면 정말로 끝도 없이 넓은 스키장 한가운데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얼마나 크고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원근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 먼 산을 보며 가다가 중간중간 눈에 처박힌 차들을 가까이서 발견할 때마다 정신이 번쩍 났다. 차를 세워뒀다가 봉변을 당한 건지, 어쩌다 보니 도로 바깥으로 빠진 차를 다시 빼낼 수 없었던 건지 모르지만 주인 없이 버려진 차들을 볼 때마다 '방심하다간 이렇게 된다'는 긴장감이 엄습했다. 이럴 때 보면 이렇게 주의력 산만하게 세계를 누비는 내가 운전을 못하는 게 범 지구적 안전을 지키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싱벨리어 가는 길에 창문으로 보이는 광경은 대략 이러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스키장 같기도 처음 보는 행성 같기도 한 광경이 사십 분 넘게 이어졌다.


얼음의 땅이라는 이름답게 날씨 어플이 일러주는 바깥 온도는 영하 17도였다. 아주 잠깐만 창문을 내려도 칼날 같은 바람 싸대기를 맞는 상황이라 차창을 통해서 볼 수밖에 없었지만 처음 마주한 아이슬란드의 대자연에 우리 모두 감탄사를 아끼지 못했다. 뭐지, 이 처음 보는 세상은. 한참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시야에 높은 산이 멀어지고 오렌지빛부터 보라색과 청색까지 고운 그러데이션이 지평선 위로 펼쳐졌다. '와...' 하면서 허허벌판에 차를 세웠다. 싱벨리어도 다른 어떤 관광지도 아닌, 360도로 빙글 돌아도 집 한 채, 사람 흔적 하나 없는 그야말로 '미들 오브 노웨어'에 선 우리는 저마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꺼내 들고 '다른 행성 같아'와 비슷한 말을 한마디씩 했다. 물론 지구 말고 다른 행성에 다녀와 본 사람은 없었으니 살면서 본 그 어떤 풍경과도 같지 않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는데 우리 넷의 나이를 합치면 얼추 이백 년쯤 되니까 이백 년 살면서 나름대로 여기저기 열심히 다니며 본 것들보다 멋진 벌판이었다면 조금 표현이 될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닌 곳의 풍경에 반해버리기, 아이슬란드에서는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난다. (photo by 반석)


우리가 서서 뭔가 열심히 찍고 있으니 '뭐 볼만한 게 있나' 싶었던지 지나가던 차량 몇 대가 도로에서 빠져나와 우리 옆에 차를 세웠다. 어느 나라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하나같이 '너무 춥다' 다음에 '아무것도 없잖아'를 외치며 둘러보다 이내 우리처럼 카메라를 꺼내드는 걸 분위기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같은 지구인이라 그런지 이 벌판을 보고 반응하는 순서가 국적과 인종 상관없이 비슷하다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카메라를 들기보다는 내 눈으로 더 열심히 담아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잊어버릴까 아쉬워 하릴없이 셔터를 누르게 하는 풍경. (photo by 반석)


차 안에서 '우리 앞으로 계속 이런 풍경 보면서 다닐걸'이라고 현실감 주입하는 발언을 하던 반석도 손가락이 금세 얼어터질 듯 벌게지는 강추위를 견디며 드론을 띄웠다. 홀린 듯 시간을 보내던 우리는 '밝을 때 골든서클 다 둘러보고 숙소까지 이동하려면 지금 싱벨리어로 이동해야 한다'라는 타임키퍼 노라의 알람에 따라 다시 길을 떠났다.


 

자연적 가치보다 인정받는 문화적 가치


서울 면적의 2/5에 (서울 면적 605k㎡, 싱벨리어 국립공원 면적 237k㎡) 달하는 싱벨리어는 국립공원이자 아이슬란드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2004년 지정되었다. 남부에 있는 신생 화산섬 쉬르트세이 Surtsey와 유럽 최대 규모의 빙하 바트나요쿨 Vatnajökull 이 각각 2008년과 2019년에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면서 현재 아이슬란드가 보유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총 세 개가 되었지만 싱벨리어는 자연적 가치가 아닌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정된 문화유산이라는 점이 다른 두 개와의 차이점이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대륙의 경계라는 지질환경적 특수성과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러 싱벨리어를 찾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일찍 인정받은 이곳의 문화적 가치란 세계 최초로 의회가 구성된 곳이라는 사실이다. 서기 930년 만들어진 의회인 알싱기 Alþingi가 이 싱벨리어에서 처음 구성되어 연례 모임을 가졌고, 당시 아이슬란드에 살았던 삼십여 개의 부족들은 이를 통해 법률을 제정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재판을 하며 공동체를 운영해 나갔다고 한다. 싱벨리어라는 이름도 '의회평원 Parliament Plains'이라는 뜻이라고 하니 자국민에게도 이곳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9-10세기에 아이슬란드에 정착해 부족을 구성했을 바이킹이 거칠고 야만적일 거라는 막연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오히려 봉건 군주와 종교의 위세가 압도적이던 유럽의 중세가 채 오기도 전에 이미 민주적 방식으로 선출한 의회를 만들었다니 놀라웠다. 어쩌면 혹독한 아이슬란드의 자연과 싸우다 보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의 논리나 전쟁보다 정돈된 규율과 평화가 더 유용하다는 결론을 얻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이슬란드는 14세기 후반부터 덴마크의 통치를 받게 되지만 1798년까지도 알싱기는 싱벨리어에서 열렸다고 한다. 그러나 1800년 덴마크 왕실 법령으로 의회가 완전히 폐지되었다가 45년 만에 다시 재개되면서 레이캬비크로 거점을 옮겼고, 1944년 6월 단 한번 싱벨리어에서 특별의회를 열어 아이슬란드 공화국을 선포했던 것 외에는 지금까지도 알싱기라는 이름으로 레이캬비크에서 의회 정치의 역사를 계승하고 있다. 작년쯤 아이슬란드의 성평등을 다룬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가장 최근에 이루어졌던 2021년 총선 결과 알싱기 여성의원의 비율은 48퍼센트에 이르렀고 기업이나 공공기관의 여성 비율이 40퍼센트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법안도 이미 십 년 전 만들었지만 페널티가 있는 강제조항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까지 갈길이 멀다는 취지의 아이슬란드 여성 의원 인터뷰가 있었다. 기사를 읽었던 당시에는 알싱기의 역사를 전혀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를 가졌다는 명성에 머물러있지 않고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의회, 평등한 사회를 향해 지금도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 알싱기를 인류의 문화유산이라 하기 충분하게 만드는 것 같다.


정치적인 의미 외에 종교적으로도 싱벨리어는 의미가 있는데 북유럽 신화를 믿던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서기 1000년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뒤에 고대 신들의 우상을 싱벨리어 북쪽에 있는 고다포스 Goðafoss에 던져버렸다는 이야기 전해진다고 한다. 고다포스가 신들의 폭포라는 뜻이라고 하니 아마도 그 사건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겠지만. 그때 전해진 기독교가 지금은 국민의 80퍼센트 이상이 믿는 사실상 국교가 되었다고 하니 북유럽 신들은 천년째 폭포 속에 고이 잠들어 있나 보다.



발산형 경계와 열곡을 아시나요


땅의 경계, 대륙의 끝과 시작, 이 거대한 지구가 살아있고 움직여왔고 지금도 움직이고 있음을 알려주는 증거들은 언제나 내 여행의 최대 관심사다. 천상 문과생이면서 우주와 지구에 관심이 많은 것은 내가 도무지 계산해 낼 수 없는 현상에 대한 경외이자 호기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여행 전에 싱벨리어에 관해 알고 간 사실이라고는 '대륙 판 갈라지는 곳' 정도였지만 지구과학 교과서에서만 봤던 판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한다는 기대만으로 충분했다.


저기 사람들이 서 있길래 싱벨리어는 저렇게 보고 가는 곳인 줄 알았다. 최소한 뭘 어떻게 보는 곳인지 공부를 좀 하고 갑시다. (photo by 반석)


해도 뜨지 않았는데 관광안내소가 있는 메인 주차장이 거의 다 찼을 정도로 이미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미 시간은 11시를 향해가고 있었으니 해가 뜨고 안 뜨고는 별 의미가 없었지만. 사실 어디에서 뭘 어떻게 보는 건지도 잘 모르고 갔는데 사람들이 깨알같이 서 있는 곳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아래로 길게 트레일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하, 저 아래로 내려가서 걷는 코스로구나. 걸으며 알게 된 거지만 대부분이 평지인 트레일 코스가 60킬로미터나 이어져서 낮이 길고 날씨가 좋을 때는 하루 이상 묵으면서 계속해서 걷거나 피크닉 또는 캠핑이나 낚시를 하며 여유 있게 즐길 수도 있다고 한다. 차로 쓱 둘러보는 것만 한 시간 걸릴 정도로 긴 코스라기에 양 발바닥과 양 주머니에 넣은 핫팩의 온기로 버틸 수 있는 만큼만 걸어갔다 오자고 하고 계곡 입구를 따라 들어가기 시작했다.


트레일 코스의 입구. 육지에서 대륙판 경계가 만드는 열곡 지형을 볼 수 있는 곳으로는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이 지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고등학교 지구과학 시간에 배웠던 내용을 되살려볼 필요가 있다. 지구가 몇 개의 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지구 내부의 맨틀이 대류 하면서 판을 움직여 서로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게 되는데, 사이가 점점 벌어지면서 그 벌어진 틈을 마그마가 채우며 확장할 때 발산형 경계라고 한다. 이때 마그마의 분출로 주변보다 높아진 지형이 바다산맥인 해령 ocean ridge을 만드는데, 이 해령의 정상부에 있는 좁고 긴 골짜기 형태의 지형이 열곡 rift valley이다. 아이슬란드가 대서양 중앙해령 위에 있다고 하니까 싱벨리어에서 볼 수 있는 판의 경계는 열곡이라는 말이고 이 열곡을 따라가다 보면 대서양과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곧 해령을 따라 판이 벌어지면서 바다가 확장하듯이 싱벨리어의 대륙판 경계도, 그로 인해 아이슬란드의 영토도 매년 확장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판의 경계는 지금도 매년 1-2 센티미터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화산활동이 활발하고 지열이 크게 발생하는 것이 발산형 경계의 특징이라는데 온천수를 식혀서 수돗물 온수를 공급한다는 아이슬란드에서는 그 특징을 어디서나 넘치게 볼 수 있다.


트레일을 걸은 시간이 두 시간 채 안되었던 거 같은데 해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모두 보았다. 차에서 내릴 땐 어두워서 선글라스 챙길 생각을 못했다. (Photo by 반석)



겨울 중의 겨울 


트레일 코스 양쪽으로 아무도 밟지 않은 듯한 눈이 두텁게 쌓여있었는데 눌러서 쌓았는지 저절로 얼었는지 발로 건드려보니 아주 단단해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눈 아래 땅이 언덕인지 푹 꺼졌는지 가늠이 안 돼서 평소 같은 호기심은 살짝 접어두고 최대한 트레일 코스로만 걸으려고 조심히 다녔다. 다행히 걷는 길은 전혀 미끄럽지 않고 깨끗했다. 차도 못 다닐 것 같은데 어떻게 이 긴 코스 위에 눈을 다 치운 걸까. 조금 걷다 보니 오렌지빛으로 해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왼쪽에 버티고 서서 압도적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기암절벽이 노란빛을 받아 브라우니처럼 보였다. 숨을 쉬면 내 입김이 얼어붙는 날씨에 당이 떨어진 탓일까.


압도적 풍광을 만들어내는 브라우니 아니 기암절벽. 용암이 만들어낸 지형이니 아마도 현무암이겠지?


걷다가 보니 옥사라 Öxará 강을 설명하는 표지판이 보였다. 옥사라포스 Oxarafoss 폭포에서 발원하여 23킬로미터를 흐르는 강이고 10-11세기 아이슬란드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졌던 옥사르부르 영지의 중심지로서 역사적으로도 중요하며 죄지은 사람을 이 강에 집어던지는 형벌이 있었고 어쩌고... 하는데 대체 강이 어디 있다는 거야? 휘휘 둘러보니, 온통 눈밭처럼 보이는 저 멀리에 드문드문 얼음이 드러나 있었다. 아하, 추워서 꽁꽁 얼어붙은 강 위에 눈이 쌓인 거구나. 강추위와 폭설은 내가 보는 모든 풍경을 아주 특별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내가 미리 읽고 들었던 그 어떤 정보와도 같지 않았다. 조금은 아쉽고 다른 계절의 모습이 무척 궁금하기도 해서 여행이 끝난 뒤에 아이슬란드의 봄, 여름, 가을 사진을 많이 찾아보았다. 선명한 색감이 가득한 사진이 압도적으로 많은 걸 보면 눈과 얼음으로 덮인 풍경이 아이슬란드가 자랑하는 절경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가 본 아이슬란드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주 적은 사람에게 허락된 겨울 중의 겨울을 체험했다는 뜻이니까.


눈밭 사이에 드문드문 보이는 얼음이 이곳이 얼어붙은 강임을 말해준다. 사실은 강을 따라 걷고 있었던 건데 전혀 몰랐다.


걸어가는 방향에서 맞바람이 한 번씩 불어 치면 눈코입이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새로 쌓인 부드러운 눈밭 표면에 바람이 지나간 자국이 물결처럼 남는 걸 볼 수도 있었다. 한겨울의 아이슬란드보다 자연이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내는 곳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바람과 햇빛, 공기마저 흔적 없이 지나가는 법이 없었고 이끼까지도 예쁘게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살을 에는 추위와 강풍에 고통스럽기까지 했지만 물결 같은 바람의 발자국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아이슬란드에서 정말 귀하게 대접받는 이끼.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이 걸려 어렵게 자라난 녀석들이기 때문에 절대로 만져서도 훼손해서도 안된다고 한다.



하지만 추운 것도 정도가 있지


가지고 온 옷을 죄다 껴입어서 방한을 잘한 편이었는데도 눈코입처럼 밖으로 노출된 부분이 아려왔다. 코는 떨어져 나간 듯 감각이 없고 입이 얼어서 말이 어눌해진 지 오래였지만 중간에 한 번 따뜻한 화장실에서 몸을 녹이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걷다 보니 시작지점에서부터 1.5 킬로미터가 넘었다는 표지판이 나왔다. 몸에 열이 많은 편이라며 아침에 핫팩을 사양했던 살별이 '내가 너무 자신만만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뒤늦게 핫팩을 건넸지만 1.7 킬로미터 지점에 있다는 옥사라포스 Öxarárfoss 까지만 가자고 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이미 지쳐 보였다. 시작점으로 다시 가려면 지금까지 걸어온 것만큼 더 걸어야 하는데 모두들 걸음도 많이 느려졌고 그만큼 추위에 더 노출될 테니 돌아갈 길이 벌써 걱정이었다.


온몸을 칭칭 감싸도 빼꼼히 나온 얼굴 부분이 아려온다 싶을 때쯤 나타나는 주차정산소 겸 화장실 건물. 살기 위해 뛰어들어 몸을 녹이고 또 걸어갔다. (photo by 반석)


좀 더 가는 건 역시 욕심일까 싶은 찰나에 옥사라포스가 떡하니 나타났다. 폭포라면 그래도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바로 눈앞에 보이기 전까지도 알아채지 못했던 건 꽁꽁 얼어붙어서였던 것이었다. 마치 촛농과도 같은 자태. 얼어붙은 부피만 봐도 수량이 엄청날 것 같은데 어떻게 저만큼이나 얼 수 있는지 신비롭기까지 했다. 마치 급속냉동으로 얼려버린 것처럼. 높이는 13미터 정도로 아주 큰 폭포는 아니지만 물이 흘러서 옥사라 강과 이어지는 모습까지 볼 수 있는 것이 장관이지 않을까 싶었다. 여름에는 폭포 아래에서 수영을 하고 겨울에는 빙벽을 등반하기도 한다는데 아쉽게도 이날 빙벽을 타는 사람은 없었다.



폭포를 보니 다들 목적지에 닿은 것처럼 힘이 났는지 즐겁게 사진을 몇 장 찍고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희한하게 해 뜬 것을 본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그 새 해가 다 내려간 오후 같아졌다. 아이슬란드는 원래 해가 중천에 뜬다는 개념은 없는 건가? 낮도 있고 날씨도 맑은데 어딘지 모르게 그늘진 느낌은 기암절벽의 그림자 때문인가? 위도 60도대의 낮과 30도대의 낮은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브라우니 절벽 구경, 이끼 구경 하면서 걷다 보니 올 때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로 출발점에 도착했다. 아직 골든서클 세 군데 중 첫 번째를 지났을 뿐인데 기분상 숙소 들어가고 싶은 느낌. 추울 때 스마트폰 배터리가 빨리 닳는 이유를 온몸으로 실험한 것만 같았다. 설상가상 아침에 정성껏 싸서 차 안에 넣어두고 나온 점심은 얼음덩어리가 되어있고... 겨울 아이슬란드는 난이도가 보통 아니라더니 아무도 싸움 안 걸었는데 오기가 생겼다. 네가 아무리 춥고 험난해봐라, 난 이 여행에서 재미난 것만 쏙쏙 뽑아먹고 말 거야.  


 브라우니 위에 슈가파우더 (Photo by 반석)



얼음처럼 차가운 바게트 샌드위치와 깻잎주먹밥을 점심으로 먹는 헝그리 정신 낭낭한 여행. 하지만 이런게 청춘이고 추억이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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