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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May 13. 2023

참는 만큼 크게 터지는 법: 게이시르

열기와 에너지가 넘치는 땅, 돌고래 비명을 연달아 지르게 하는 곳

세계 제일의 간헐천


싱벨리어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 조금 못 미치게 이동하면 하우카달루르Haukadalur 계곡에 있는 간헐천 게이시르Geysir를 볼 수 있다. 한자를 모르는 요즘 세대에게는 영어단어 게이저Geyser가 더 익숙할지 모르겠으나 나 같은 사람은 간헐천(間歇泉)의 한자를 찾아서 뜻을 풀어보는 게 더 의미가 와닿기 때문에 사이 간(間), 쉴 헐(歇), 샘 천(泉) 각각의 뜻을 해석해 보면… 사이사이 쉬어가는 샘… 옹달샘? 음, 아무래도 한자문화권은 새로운 지각이 형성되는 곳이 아닌 오래된 땅이라서 간헐천을 본 적이 없었나 보다. 특정 국가나 언어문화권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을 영어로 옮길 때 현지어를 그대로 차용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어의 재벌 Chaebol, 화병 Hwa-Byung 같은 단어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된 것은 그 예에 해당하지만, geyser 같은 경우는 새로운 단어 geyser와 그 정의를 새롭게 만든 셈이니 그야말로 아이슬란드가 지구상의 간헐천 중 대장임을 인정하는 게 아닌가 싶다.


주차장이 빽빽할 만큼 관광객이 많았지만 들어오고 나가는 차량들이 바쁘게 교차했다. 다들 여유 있게 골든서클을 돌겠다고 어두울 때 길을 나섰을 텐데 해가 지고 있는 시점에 한 개를 남겨두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해 서두르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처럼. 덕분에 우리는 주차비 정산을 잊었다. 골든서클의 세 관광지는 모두 입장료는 무료이지만 주차요금이 있다. 알아서 기계에 체크를 하고 영수증을 차량 앞쪽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두는 자율 시스템인데 그만 주차 기계에 들르는 걸 잊고 바로 게이시르 쪽으로 향했던 것이다. 절대 고의가 아니고 까맣게 잊은 거였지만 알아차린 시점은 숙소에 돌아와서였다. 천만다행으로 그냥 넘어갔지만 불시에 검사를 해서 주차비 지불을 하지 않은 게 발각되면 벌금이 중하다고 하니 쓸데없는 범법행위는 하지 맙시다.



스트로쿠르로 걸어가는 길 양쪽으로 열기가 피어나는 물이 흐른다. 얼음 아래로 흐르는데 고온이라니 거짓말 같지만, 무모한 실험은 하지 않았다.



당신은 게이시르의 분출을 보지 못했다


일정한 주기로 물과 증기를 분출하는 간헐천을 통칭하는 영어단어가 게이저인 것과 달리 아이슬란드에서 게이시르는 약 1만 년 전에 처음 분출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 특정 간헐천의 이름이다. 역사에 기록된 바로는 분출은 몇 년마다 한 번씩일 때도 있었고 또 하루에 몇 번씩 계속되다가 또 수년간 잠잠할 때도 있었다는데 이 분출을 지질학자들이 좀 더 자극하거나 활성화시킬 수도 있나 보다. 2000년에 인근의 지진으로 다시 게이시르가 되살아나 122미터까지 물을 뿜었고 2003년까지도 매일 세 번씩 간헐적인 분출이 계속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는 다시 잠잠해져 20년간 잠들어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게이시르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 게이시르 근처에 있는 다른 간헐천의 분출을 보러 가는 것이고, 평균 8분 간격으로 지금도 분출하고 있는 그 간헐천의 이름은 스트로쿠르Strokkur 이다.  예능 <꽃보다 청춘>에서 보여줬던 간헐천도 스트로쿠르이고, 관광객들도 다들 그쪽에만 빙 둘러서 있는 걸 보니 아마도 평균 30분 이내로 머무는 관광객이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간헐천이 현재로선 이것뿐인가 보다. 하지만 입구에는 스트로쿠르 보다 좀 더 분출 간격이 긴 간헐천의 이름도 순서대로 소개하고 있었다. 간헐천의 크기나 분출 높이는 분출 빈도에 반비례하는 것을 확인하면서, 평소에 조용한 사람이 화를 꾹꾹 눌러 참고 쌓다가 폭발할 때 얼마나 무서운지를 떠올려보았다. 그런 사람들을 게이시르에 비유한다고 하면 좋거나 싫거나 그때그때 분출하는 나 같은 사람은 이를테면 스트로쿠르인 것이다.


마그마가 지나가는 자리일 테니 당연하지만 이 계곡에는 스트로쿠르 말고도 많은 간헐천과 온천, 화산가스 분출구 등 지열 지형이 분포하고 있다. 한겨울이 아니면 계곡에서 트레킹을 하는 사람도 많다는데 내가 머무는 자리에 갑자기 뭔가 분출할까 봐 무서워서 어떻게 머물까도 싶다.




땅에서 솟아나는 천연 에너지원


스트로쿠르로 가는 양쪽 진입로에는 눈과 얼음이 덮여있는 길 군데군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이 흘렀다. 얼핏 보면 그냥 깨끗한 도랑물 같이 보이는데 온도가 100도씨 정도 된다며 출입금지 표지판을 무섭게 붙여놨다. 날이 워낙 추워서 지표로 드러난 순간 식어버릴 것 같긴 했는데 그래도 솟아오르는 순간의 물은 100도씨가 넘을 때도 있다고 한다. 온천수가 순수한 물이 아닐뿐더러 지하에서 대기압보다 높은 압력을 받고 있어 끓는점이 높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심각한 부상이나 사망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경고문이 아니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몇 도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온천도 따지고 보면 간헐천과 동일한 물이긴 하지만 간헐천 주변에 흐르는 물은 너무 뜨거워서 수영도 금지고 미네랄 함량이 높아 음용도 금지라고 한다.


아이슬란드의 주요 산업과 에너지원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 지열발전이라는 내용이 꼭 나온다. 땅 속 깊숙이에서 얻을 수 있는 지열을 전기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이 발전방식은 환경 친화적이지만 초기 시설 투자비용이 많이 들어 채산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는데, 아이슬란드는 풍부한 지열원과 이에 대한 국가차원의 투자 결과 2020년 기준 수력발전으로 67.6퍼센트, 지열발전으로 32.3 퍼센트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출처: CIA World Factbook) 최근 완전 탈핵으로 화제가 된 독일 이전에 이미 완전한 탈화석연료, 탈핵을 이룬 나라다. 보고만 있어도 입이 떡 벌어지는 경관 외에도 아이슬란드가 자연에게 받은 선물은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는 물론 친환경 에너지로 전환하고자 하는 국가의 의지 없이는 달성하기 어려운 결과임이 분명하다.


이곳에서 나오는 뜨거운 온천수를 수도인 레이캬비크까지 이동시켜 도시에 온수를 공급하고 있다는 사실도 현지인에게 들었다. 이동 중 손실되는 열이 5퍼센트 미만이라 재가열 하지 않고 각 세대에 공급해 사용하고 있다고 하니 기술력도 참 대단하다. 첫날 묵었던 숙소에서 온수를 쓸 때 하수구인지 계란노른자인지 뭔가 다른 냄새가 난다고 느꼈는데 땅에서 끌어올린 미네랄이 가득한 물을 그대로 받아 쓴다는 걸 알고 나니 그 독특한 냄새가 불쾌하기보다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졌다.


화산온천 지대라 하면 왠지 위험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각 세대에 온수를 공급하는 에너지원이라 하니 아이슬란드인에겐 제어가능하고 보호해야할 자원의 느낌이지 않을까.



딱 한 번만 더 기다리자


우리가 걸어가는 사이 저 멀리에서 꽤 큰 분출이 일어났다. 분수쇼의 하이라이트 같은 강한 물줄기가 하늘로 솟구치고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놀란 함성이 마치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싱벨리어에서 꽁꽁 언 몸을 차에서 잠시 녹였다가 내리니 바깥공기가 아까보다 더 춥게 느껴지기도 했다. 붉게 해가 내려갈 즈음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뒤뚱뒤뚱 걸음을 재촉해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분출구 주변으로 갔다. 다들 삼각대나 셀카봉, 짐벌 등을 이용해 불시에 찾아오는 그 분출의 순간을 잡으려고 기대하며 기다리는 게 보였다. 성경에 보면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는데 그 못이 한 번씩 움직일 때 병든 사람이 들어가면 무슨 병이든 낫는다고 하여 38년 간 일어설 수 없었던 병자가 그 연못가에서 물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나온다. 사람이 들어갔다는 걸 보면 베데스다는 분명 간헐천은 아니겠지만 물이 움직이는 걸 다들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언제 솟구칠까 조마조마해하는 나를 포함한 인파들이 마치 베데스다 앞에 몰려있던 사람들 같았다.



걸어가는 중에 만난 첫 번째 분출. 마치 불이 난 것 같은데 저게 다 수증기라니. 올라온 수증기가 바로 얼어붙어 우박으로 떨어질 것 같은 날씨였다.


물 정중앙으로부터 조금 치우친 곳에 수면이 부글부글 하는 듯한 움직임이 점점 커진다. 바람이 불어 일렁이나 하다가 살짝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나서 ‘이거다!’ 싶었는데 또다시 부글부글 원만 그리고 있다. 몇 번을 낚이는가 하다가 별안간 폭발하듯 물이 터져 올라왔다. 내내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깜짝 놀라 돌고래 비명이 절로 나왔다. 스트로쿠르의 분출 높이는 때마다 다르지만 작게는 15미터에서 높으면 40미터까지도 높이 올라간다고 하는데 정확히 방금 분출이 몇 미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아까 걸어오며 본 것보다는 좀 작은 느낌이었다. 추위에 적응되었다기보다 마비 상태에 이른 모두들 짐짓 차로 돌아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한편으로 한 명만 고집을 피워도 한 번은 더 볼 것 같은 분위기라 나와 노라가 ‘딱 한 번만 더 기다리자’라고 분위기를 몰았다.


분출을 기다리고 서 있는 인파들 (Photo by 반석)


그래, 방금은 너무 깜짝 놀라서 영상도 제대로 못 찍었으니까, 각 잡고 잘 기다려보자. 평균 8분이라고 하는데 조금만 더 일찍 터져주면 좋겠다. 입이 얼어서 말이 안 나오길래 생각만 이리저리 하며 다시 한번 대기하고, 우리 팀 공식 사진가인 반석은 구도를 쟀는지 저 반대편 멀리로 걸어갔다. 기대와 달리 지난 분출에 걸렸던 시간보다 체감상 몇 분을 더 기다려도 물은 일렁이기만 할 뿐이었다. 기다림이 길긴 길었는지 저쪽에서 누군가 돌멩이를 분출구 안쪽에 던지는 정말 위험하고 몰지각한 행동을 했다. 분출 순간에 그런 돌멩이가 함께 튀어 올랐다가 사람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물과 함께 내 맘도 부글부글 하는가 했는데 이번엔 정말이다. 한 번에 쑤욱 들어가는 분출 직전의 느낌이 났다. 어…어…어……아악!! 이번에도 돌고래 비명을 참을 수 없었다. 방금 전보다 훨씬 높이까지 잡히도록 동영상을 찍고 있었는데 아까의 1.5배는 족히 넘는 높이로 올라간 물줄기는 이번에도 화면에서 끝이 잘렸다. 유독 오래 참더라니 내 이렇게 크게 터질 줄 알았다. 화를 오래 참는 사람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여러분. 아까 올라갔던 그 물줄기에 만족하고 갔더라면 스트로쿠르가 어떤 간헐천인지 절반 밖에 모를 뻔했다. 강추위 속이긴 했지만 20여분의 투자로 지구가 가진 강력한 지열에너지의 분출을 이만큼 볼 수 있다니 게이시르 국립공원은 정말 문자 그대로 열기와 에너지가 넘치는 땅, 돌고래 비명을 연달아 지르게 하는 곳이다.



한번 더 기다려서 보게 된 어마무시한 분출. 높이가 매번 일정치 않기 때문에 한번만 더 한번만 더 하게 된다. 몇십미터나 될까요? (Photo by 반석)



활자 매체의 매력을 살리기 위해 영상은 자제하려 하였으나, 이 장면은 꼭 보여드리고 싶어서... 제 돌고래 비명도 함께 감상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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