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인 <No Time to Die: 완도살롱 폐업기>를 읽고
올해 초, 전라남도 해남에서 달마고도 트레킹을 마친 뒤 가까운 대중목욕탕을 찾아 완도에 들어갔다. 계획엔 없었지만 들어와 보니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던지라 남은 며칠은 완도에서 머물기로 결정하고 지도 어플을 켜서 여기저기 찍어보던 내 손가락이 멈춘 곳은 <완도살롱>이라는 곳이었다. 영업시간은 저녁 여덟 시에서 새벽 한 시, 흥미로운 시그니처 칵테일들을 메뉴에 올려두고 있었지만 독립서점을 업종명으로 하는 그 공간은 이름만으로도 매우 흥미로웠다. 서점과 술, 살롱이라는 조합을 생각해 내고, 굳이 이 섬에서 그걸 구현해 내는 주인이 몹시 궁금해지면서 '여길 가보라고 완도가 나를 불렀구나' 싶을 정도의 강한 이끌림으로 그날 모든 일정과 동선을 완도살롱 방문에 맞춰 정했다. 예상대로 조용한 항구 동네에 스피크이지바(* Speakeasy Bar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되지 않고 아는 사람만 찾아갈 수 있는 은밀한 가게를 통칭하는 말로 간판이 없고 출입구가 숨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1920~30년대 미국 금주법 시대에 생긴 무허가 주점이나 주류 밀매점을 일컫는 단어에서 유래. 네이버 지식백과 시사상식 사전)처럼 은밀하게 자리 잡은 그 공간에서 나와 동행, 살롱의-왕이자 얼굴 마담이라 하는-사장님 셋이서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며 보낸 몇 시간은 해남과 완도에서의 다른 기억들을 덮어버릴 만큼 즐거웠다.
그로부터 약 한 달 하고도 일주일쯤 후, 새로 문을 연 독립책방 <피넛버터팔콘> 대표님이 마련하신 자리에서 작가님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서울도 완도도 아닌 수원 광교에서, 어쩌다 보니 사장과 손님이 아닌 같은 서점에 책을 입고한 작가 간으로서. 후자의 사실이 '초창기 브런치 문학상 수상작가이자 세 권의 출간작이 있는' 그가 가진 작가로서의 정체성이나 위상과 나의 그것을 동등하게 할 순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그는 완도에서 수원까지 올라오는 길에 내 책 <이필숙 씨 딸내미 참 잘 키우셨네요>를 완독 했다며 아직 그가 쓴 세 권의 책 중 한 권도 펼쳐보지 못한 나를 열없게 했다. 마치 완도살롱에서 보낸 시간의 속편인 듯 뒤풀이인 듯 막차시간 간당간당하도록 즐겁게 이어진 그날, 그는 우리의 인연을 포함한 그의 많은 경험을 근거로 들어 사람과 인연을 끌어당기는 힘인 '인력'에 관한 자신의 믿음을 설파했다.
저자의 친필서명을 받아서 들고 온 그의 최근작 <No Time to Die: 완도살롱 폐업기>를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 천천히 한 문장씩 씹어먹어 주길 바랐다면 미안할 정도로 속도감 있게 읽어 내릴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우리가 나눈 이틀간의 대화에서 책의 내용 중 대부분을 다루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책장을 덮지 않고 완독 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와 실제로 만났기 때문이었다고 감히 확신할 수 있다. 책이 재미가 없다거나 수준이 낮아서와 같은 이유는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가 구사하는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유려하고, 페이지마다 재치로 사람을 붙잡아두는 글의 맛이 넘친다. 하지만 그러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단 한 가지 나를 밀어내는 것이 있다면 농담 같은 표현 속에 꽤나 진정성 있게 느껴지는 작가의 자기애와 자기 확신이었다. 외모에 관한 자신감은 다소 근거 있다-실제로 작가님은 패션화보에서 걸어 나온 듯 장신에 스타일리시함을 겸비했다-쳐도 에피소드 곳곳에서 드러나는 그의 확고함이 작가를 상상하며 읽는 나에게는 묘한 불편함을 주었을 게 확실해 보였다.
척력(斥力, repulsion), 나는 그 감정이 같은 극끼리 밀어내는 자석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밀어내는 힘의 일종이라 생각한다. 순도 높은 자존감과 자기애 덩어리로 알려진 내가 스스로를 가장 의심할-몇 안 되는-때가 바로 나의 확고함, 단정 짓는 말과 행동을 발견했을 때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결정하고 뒤돌아보지 않는 점, 상대방을 끝내 설복시키고 내 선택과 노력을 언제나 긍정하게 되는 점은 인생에 유용한 기술이자 타고난 재능에 가깝지만 그렇게 만족스러운 자아는 필연적으로 많은 것을 놓치며 살게 된다는 것을 깨우친 뒤에도 딱히 다르게 살 수는 없었다.
많은 이야기가 생략되었음을 감안하더라도 훌쩍 낯선 섬으로 가서 서점을 열고, 경영하고, 그밖에 많은 선택과 판단을 하는 작가는 나와 너무 비슷한 확고함을 가진 사람 같아 보였다. 제주 카페 사우다드에서 카페 이름의 뜻에 관해 생각했다든가, 줄리엣의 집 때문에 굳이 베로나에 들른다든가, 2021년에 매트릭스를 정주행 했다는 사실까지 나를 투영할 공통점이 참 많기도 했는데 왜 유독 척력을 작용시킬만한 요소가 눈에 들어왔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어느 독립책방에서 마음에 쏙 드는 표지와 판형에 이끌려 집어 들었다가 척력 때문에 다시 내려놓았을지 모르는 이 책을 다행히도 작가와의 만남 이후에 읽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의 만남을 통해 열 시간 이상의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내고 나니 그가 나와 얼마나 다른 지점에 있는지와 나와는 매우 다른 그의 흡인력을 글이 아닌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너무나도 재미있는 사람책을 먼저 읽은 뒤에 접한 종이책은 그의 매력에 관한 부연설명과 같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고 난 뒤에 그가 얘기한 '인력'에 관해 더욱 생각했다. 척력이 작용하기 전에 우리를 만나게 한 어떤 힘이 분명히 있다는 데 믿음이 생겼다.
우리에게 다음 만남이 있을까. 기약 없던 헤어짐 후 사십여 일 만에 재회했으니 없다고 단정 짓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아니어도 상관없다. 우리에게 한번 작용했던 이 인력은 두고두고 꺼내 쓸 각자의 이야깃거리가 될 테니. 우리는 작가니까, 좋은 이야기가 되어 남는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한대도 친구나 다를 바 없다.
[덧붙이는 말]
내 생일이 12월 3일임을 말하자마자 "123이네요"라고 말했던-내가 누군가에게 내 생일을 주지 시킬 때 빼먹지 않고 하는 말이지만 듣는 사람은 보통 심드렁해하는 표현이다-그의 생일은 11월 1일이라고 한다. 사주 이야기가 책에서 아주 중요한 에피소드길래 어깨너머로 배운 만세력으로 그의 정확한 사주를 찾아보니 쇳덩이나 큰 바위를 상징하는 경금이었다. 겉으로 두드러지는 특징이 강한 자기 확신과 주관이고 의외의 감수성과 부드럽고 따뜻한 면은 숨겨져 있다는 경신일주인데 놀랍게도 그는 갑각류와 같은 특성을 나타낸다는 전갈자리다. 이쯤 하면 명리학과 별자리가 (유사) 과학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