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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Jul 21. 2023

말차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 말차의 감칠맛은 찻잎의 절규인 것이다

난생처음 아빠랑 단둘이 떠난 제주 여행에서 우리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코스를 짜는 것은 최대의 난제였다. 오름은 힘들고 해변은 뜨겁다는 아빠가 과연 어딜 가야 제주의 자연도 좀 누리면서 흥미를 느낄까 고민하다가 몇몇 친구들을 통해 이미 검증받은 올티스 다원의 티 테이스팅 클래스에 참여했다.


올티스 다원은 서귀포에 있는 오설록 보다는 인지도가 낮은 편이지만 제주 북동쪽이라 조천, 구좌, 성산 지역에서 접근성이 좋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거문오름 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차밭 주위로 제주에서 가장 자연유산적 가치가 높은 오름의 정취까지 느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사실 전부터 가고 싶어서 지도에 표시해 두었지만, 그간 기회가 닿지 않아 지인들에게 추천만 해온 곳이었다.


다원에서 하루에 세 번씩 진행하는 티 마인드 Tea Mind는 차밭에서 수확하고 생산한 네 종류의 차를 맛보고 체험하면서 차와 다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한 시간 길이의 체험클래스다. 우리 부녀까지 총 열 명의 다양한 사람들이 조금은 조심스럽고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클래스에 참여했고, 팽주(烹主: 차를 우려내어 주는 사람)라 불리는 분이 차분하게 그날의 차를 대접하고 설명해 주셨다.


가장 여리고 순한 잎을 따서 만드는 녹차를 그 잎이 참새 부리를 닮았다고 해서 세작(細雀)이라고 하는데, 이 잎을 수확하기 시작하는 때가 24 절기 중 곡우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날 우리는 곡우가 되기도 전에 잎을 수확하여 만든 최고급 녹차 우전(雨前)을 맛볼 수 있었다. 세작도 일반 녹차보다 비싼데, 세작보다도 두 배 비쌀 정도로 귀하고 생산량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일 년 중 아무 때나 얻을 수도 없는 귀한 행운이었다. 차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이 시기쯤 나오는 우전을 다원마다 예약구매한다고도 해서, 같은 차를 왜 여러 군데에서 사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찻잎 가공의 두 가지 방식인 찐 찻잎과 덖은 찻잎 각각의 비율을 얼마씩 배합하느냐에 따라 그 다원의 고유한 맛이 완성된다고 한다. 마치 로스터리마다 원두의 비율을 달리 한 하우스 블렌드를 만드는 것처럼, 같은 찻잎이라고 다 같은 차가 아니었다. 찐 찻잎이 7할이라 갓 삶은 햇밤 맛이 나는 올티스 우전을 입에 머금고 이제 막 운무가 걷히기 시작한 거문오름을 올려다보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녹차를 시작으로 홍차, 호지차를 차례대로 맛보고 마지막 말차의 순서가 되었다. 잎으로 우려내는 다른 차와는 다르게 분말 형태로 만들어진 말차는 마시기 전 격불이라는 독특한 과정을 거치는데, 거품기 비슷하게 생긴 차선이라는 도구로 사발에 탄 말차를 머랭 치듯 빠르게 쳐서 거품을 내는 것이다. 자기가 마실 차를 직접 격불 해보자고 하셔서 열명이 모두 앞으로 나와 각자 맘에 드는 사발을 골라 서툴게 손목스냅을 움직였다. 짙은 녹색이었던 차 위로 고운 거품이 올라오는 동안 팽주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녹차 나무는 있는데, 홍차 나무는 어디 있냐고 물어보세요. 홍차를 만드는 나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같은 찻잎을 언제 따고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녹차, 홍차, 백차, 우롱차 등으로 나뉩니다. 그러면 아까 마신 녹차와 지금 이 말차는 어떻게 다를까요?" 


언젠가부터 녹차맛 아이스크림과 초콜릿이 말차맛으로 바뀌어간다고 느꼈지만 트렌드의 변화라고 생각할 뿐 그 맛의 차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터였다. 특정 나라나 지역에서 녹차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건가 정도로 생각했던 내가 처음으로 그 둘의 차이에 궁금증을 느꼈다. 팽주님은 왼팔을 뻗어 통유리창 너머의 차밭을 가리키셨다. 


"말차도 똑같이 저 차나무에서 만들어집니다. 며칠 뒤면 저 차밭 전체에 차광막을 치는데요, 여기서부터 말차와 녹차가 갈라집니다."


수확하기 약 한 달 전까지 검게 가려 직사광선을 차단하면, 찻잎들은 그 차광막의 얼기설기 엮인 틈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을 통해 광합성을 하려고 기를 쓰고 이파리를 넓힌다고 한다. 그 애쓰는 중에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의 일종인 카테킨의 생성을 자극하고 엽록소 수치를 증가시키면서 잎은 더욱 짙은 초록색으로 변한다. 강한 태양 아래 자란 찻잎은 떫은맛의 폴리페놀 함량이 높아지고 아미노산 함량은 이와 반비례하게 되는데, (그래서 녹차도 볕이 약한 초봄에 여린 잎을 채엽해야 단맛이 나는 고급 녹차가 된다.) 이와 반대로 그늘 아래 자라 폴리페놀 함량은 낮고 아미노산 함량이 높아진 찻잎으로 만드는 말차는 떫은맛이 적고 감칠맛이 나기 때문에 잎과 줄기 전체를 갈아서 가루로 먹는다. 


생물학적이고 영양학적인 설명이 끝나자 나는 가루가 되어 내 앞에 거품을 내면서 녹아내린 찻잎을 생각했다. 광합성을 통해 엽록소를 만들어야 하는 식물에게 어느 순간 햇빛을 차단한다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태양광을 직접 에너지원으로 하지 않는 인간이 캄캄한 하늘을 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위협과 공포였을 것이다. 아마도 사람의 호흡을 틀어막거나 음식을 박탈하는 것과 비교하는 것이 더 잘 들어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 말차의 감칠맛은 찻잎의 절규인 것이다. 내 숨이 곧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느끼면서 살기 위해 생명의 구성요소까지 바꾸어 내는 그 절박함의 결과물을 즐겁게 취하는 인간이 지독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이 미묘한 맛의 차이를 느끼고 말차를 만들어냈을까. 분명 나보다는 차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겠지만... 찻잎에 굳이 생명이 있다고 상상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자꾸 신경이 쓰였다. 공장식 축산의 폭력성을 다 알고도 고기를 끊지 못하는 주제에, 다원에 와서 찻잎에 이입하는 나의 모순을 누가 알아채고 웃기라도 할까 봐 격불을 마친 말차를 얼른 마셔보았다. 이런 생각 후에도 기가 막히게 맛있다고, 말차가루 좀 사가자고 아빠한테 말하는 나의 두 번째 모순이 웃겨서 나 혼자 계속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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