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매일단어

선후배

by 담쟁이

꽤 자주 만나는 편이었던 스물몇 살 무렵에 우리는 언제나 싸움을 방불케 할 정도로 언성이 높아지면서 피로감이 몰려오는 대화를 했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잘나고 똑똑하고 기 센 애들 둘이서 한치도 양보하는 법 없이 제 할 말만 하다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그때는 에너지가 지금보다 충만했던 까닭인지 그런 게 지적 자극과 긴장감을 주는 재미있는 관계라 생각했다.

지난 몇 년 새 각자의 삶에 있었던 큰 변화의 영향인지 오랜만에 만난 우리의 대화 패턴은 확실히 달라져있었다. 그 변화는 ‘힘을 빼고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 거의 확실했고, ‘아직도’ 매사에 힘을 다해서 싸우고, 화를 내고, 또 공을 들이는 나는 ‘심장에 열 내는 걸 그만두고 좀 릴랙스’ 하라는, 자연인 같은 솔루션을 받아가지고 왔다.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 누구보다 싫어하지만 오래간만에 솔깃한 조언이어서 조금 노력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편안 해 진 것 같아. 힘 뺀 너 너무 좋아 보여”라고 끝인사를 한 나에게 엉뚱한 말이 돌아왔다.

“언니 그거 알아요? 나한테 처음으로 베니건스 사준 사람이 바로 언니라는 사실. 그때 몬테크리스토를 알려주었죠 언니가. 진짜 먹으면서 너무 황홀했던 기억.”

‘어쩌라고’라든가 ‘그게 무슨 뜻이야’ 따위의 무정한 반응은 하지 않았다. 다만 코엑스 베니건스였다던 그때의 기억을 덧없이 더듬으며, 나랑 고작 열서너 달 차이나는 이 친구와 나를 설명하는 첫 번째 단어가 ‘고등학교 선후배’라는 사실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분명 선배랍시고 지갑을 열었겠지. 용돈 받아쓰던 나한테 무슨 돈이 있었던 것인가 의아하긴 하지만... 어쨌든 후배가 산 밥을 먹는 오늘의 나가 그때의 나를 칭찬합니다. 잘했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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