겜알못의 게임로그 #24: <1000x레지스트>

1000xRESIST

by 해도연

|타이틀| 1000x레지스트 (1000xRESIST)

|최초출시일| 2024년 10월 8일

|개발사| sunset visitor 斜陽過客

|유통사| Fellow Traveller

|구입처| Microsoft Store (Xbox)

|사용기기| 엑스박스 시리즈X, 엑스박스 시리즈X|S 컨트롤러

<1000x레지스트>

"Love your mother and trust in her teachings"


2047년, 정체불명의 외계 존재 '점거자(Occupants)'의 등장과 함께 몸에 있는 모든 수분이 눈물로 빠져나가며 사망에 이르는 질병이 퍼져나가 인류는 멸망에 이릅니다. 그로부터 1,000년 뒤, 지구에는 '과수원(Orchard)'이라 불리는 작고 폐쇄적인 공동체만이 남게 됩니다. 이곳에서는 눈물병 사태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아이리스의 유전자로 복제된 '자매들(Sisters)'이 아이리스를 '올마더(Allmother)'라 칭송하며 각자 부여받은 역할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관찰자 '와처(Watcher)'는 올마더의 기억을 탐색하는 '교감(Communion)' 의식을 치르던 중, 자신과 가장 가까운 자매였던 '픽서(Fixer)'가 올마더를 배신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들을 위해 올마더가 감수하고 있던 커다란 희생을 알고 있던 와처는 고민 끝에 돌이킬 수 없는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이야기는 와처가 분노에 찬 표정으로 올마더를 끔찍하게 살해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다시 한번 올마더 아이리스의 기억을 되짚으며 새로운 진실들을 발견해 나갑니다.


"Do your duties and carry out your function"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인디 개발사 Sunset Visitor의 데뷔작인 <1000x레지스트(1000xResist, 2024)>는 소위 '손맛'이 있는 게임은 아닙니다. 조작은 주로 이동과 대화에 집중되어 있고, 기억 속을 탐험하는 '교감' 과정에 있는 약간의 액션마저도 실패가 거의 불가능할 만큼 관대하고요. 그래픽은 좀 투박해 보이고, 간단한 퍼즐조차 없는데, 길은 미로 같고 지도는 불편합니다. 그래서 짜릿한 액션과 조작의 쾌감, 퍼즐의 재미를 기대한다면 게임성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작품이고요.


하지만 <1000x레지스트>는 오직 이야기와 연출만으로도 직접 컨트롤러를 잡고 플레이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야기의 완성도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고, 캐릭터를 직접 움직이는 게임이기에 가능한 훌륭한 현장감과 연출까지 곁들여지면서 영상과 글만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황홀한 수준의 감정적 고양을 이끌어 내는 작품이었습니다.


인디 개발사의 첫 작품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미디어계의 퓰리처상이라고 불리는 피바디상을 수상했고, SF계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인 네뷸러상과 휴고상의 게임 관련 부문에서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요.


"For a future far from sin or incineration"


초반의 낯선 세계관은 다소 난해할 수 있지만, 이야기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면 놀라운 흡입력을 발휘하며 반전에 반전을 쏟아내고 인물 간의 관계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뒤집어집니다. SF 단편 소설의 정점 같은 장면이 이어지고, 클라이막스라고 믿었던 지점이 사실은 더 거대한 서사의 중반부에 불과했다는 게 드러나면서 플레이타임은 훌쩍 길어집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장면

게임 곳곳에서 아서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과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흔적과 영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장르적 유희와 고찰에만 머무는 대신 현실에 발을 딛으며 홍콩의 비극적 역사, 폭력과 따돌림, 대물림되는 가족의 트라우마, 계급 사회와 차별, 이민자와 디아스포라, 권력에 대한 순응과 저항 등 우리와 지극히 가까은 주제들을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서사와 감정, 인물에 이르기까지 많은 측면에서 수많은 굴곡이 있는 이야기이다보니 여정을 끝내고 났을 때는 10시간 남짓한 플레이였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크고 묵직한 감정과 기억의 잔상이 남았던 것 같네요.


"We’re all just flowers in a garden of her making"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굉장히 많은 캐릭터가 나옵니다. 그들 모두가 길게든 짧게든 인상적인 역할을 수행하고요. 가장 핵심적인 인물을 골라본다면 아무래도 다섯 자매들이 있겠네요.

왼쪽부터 와처, 픽서, 뱅 뱅 파이어, 힐러, 노워

모두 각자의 사정과 정서가 있고 개성도 넘치다 보니 하나하나 소개하기는 쉽지 않네요. 와처는 전반부의 주인공으로서 플레이어와 함께 새로운 진실을 마주하며 함께 혼란스러운 감정을 공유했고, 픽서는 가장 먼저 과수원을 떠나지만 견고한 세계 속에 가장 먼저 균열을 만들어낸 존재이기도 했지요. 뱅 뱅 파이어(Bang Bang Fire)는 가장 강하고 호전적일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가장 먼저 무너졌습니다. 힐러(Healer)는 시종일관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그 목소리 너머로 온기를 감추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혼란스러운 감정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워(Knower)는 아마 이 게임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깊고 복잡한 내면을 품고 있었고요.


이 외에도 중요하거나 기억에 남는 캐릭터가 많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바텐더나 (여러) 자오, 크리스 같은 인물들. 하지만 모든 것이 급변하는 후반부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여기까지만 하지요.


"The ALLMOTHER she shines so bright"

아이리스 a.k.a 올마더

그리고 1,000년에 이르는 이야기의 중심축에는 아이리스, 즉 올마더가 있습니다. 미래 인류의 수호자이자 숭배의 대상인 동시에, 부모에게 물려받은 트라우마와 자기 자신의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자기 딸들에게 다시 투영해 버린 가련한 딸이기도 합니다. 게임의 전반부에서 아이리스의 과거를 추적하는 과정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혹은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고통과 후회의 기억을 되돌아보는 과정이기도 했고요.


Iris/Allmother: You have no idea... How I missed you.
아이리스/올마더: 왜 몰라주는 거니…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어머니, 그리고 올마더 아이리스


"But mother’s glow is not as warm as it had seemed to be"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1000x레지스트>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반복되는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다양한 입장과 관점이 등장해요.


자신이 당한 괴롭힘에 대한 원망을 품은 자,

자유와 해방을 향해 열망을 불태우는 자,

과거를 버리지 못하는 자,

종교와 우상에 빠져드는 자,

분노한 혁명가,

이타적인 배신자,

트라우마를 품은 채로 현실에 순응하거나 현실을 견뎌내는 자,

앞만 보며 분노하는 자,

권력의 칼과 망치가 된 자,

등등.


그래서 이들을 통해 묻는 것만 같습니다. 같은 비극을 겪어도 우리는 왜 서로 다른 기억을 품고,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는지를. 같은 과거라도 누가 언제 어떻게 돌아보느냐에 따라 얼마나 다른 기억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를.


"And it feels very far from me"


재미있는 점은 게임 속에 다양한 대화 선택지가 나오지만, 그 어느 것도 결말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언뜻 무성의한 게임 설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의도적인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선택을 바꿀 수 없습니다. 머릿속에서 아무리 후회하고 다른 선택지를 상상하더라도 눈앞의 현실은 요지부동이고 미래는 여전히 미지수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어떤 기억을 품고 미래로 나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최종장의 끝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버리고 갈 기억과 품고 갈 기억을 선택하게 합니다. 그리고 오직 그 선택에 의해서만 결말과 에필로그가 결정되고요.


"Soon we’ll grow beautiful enough to be worth taking"


투박해 보였던 그래픽은 이야기에 몰입하기 시작하면 어느새 이 게임만의 독특한 미술적 개성으로 다가오고, 성우들의 절제되면서도 감정 어린 연기와 훌륭한 한글은 몰입을 한 층 더 강화해 줬습니다. 핵심 무대인 과수원은 길 찾기가 조금 어렵기는 했지만, 덕분에 예상치 못한 공간과 디테일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었고요. 단점이 없진 않지만, 다른 장점들이 모든 걸 상쇄하고도 남는 것 같습니다.


음악 역시 굉장히 훌륭해서 OST도 구입했습니다. 프로모션으로 받은 게임패스로 플레이를 하고 있었는데, 한 번의 플레이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결국 게임도 구입해 버렸고요.


화려한 액션보다 가슴을 후벼 파는 아름다운 서사를 찾고 있다면, 쏟아지는 게임들 속에서 단 하나의 특별한 경험을 원한다면, <1000x레지스트>는 결코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덧1: 소제목은 OST 중 Fixer's Song의 가사입니다.


Love your mother and trust in her teachings
Do your duties and carry out your function
For a future far from sin or incineration

We’re all just flowers in a garden of her making
Soon we’ll grow beautiful enough to be worth taking

The ALLMOTHER she shines so bright
But mother’s glow is not as warm as it had seemed to be
And it feels very far from me
And it feels very far from me


덧2: 저는 유튜브에서 깐 님의 리뷰를 보고 이 보석 같은 작품을 알게 되었습니다. 숙련된 게이머의 더 균형 잡힌 리뷰를 원하신다면 이 영상도 추천드립니다.



다음 게임으로는 <사일런트 힐 f(Silent Hill f, 2025)>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1월 말이나 2월 초 정도에 시작할 것 같네요. 그리고 그다음은 2월 27일에 출시될 대망의 <바이오하자드 레퀴엠(Resident Evil requiem, 2026)>입니다.


왼쪽: <사일런트 힐 f>, 오른쪽: <바이오하자드 레퀴엠>


지금까지 플레이한 게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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