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날의 기억, 그 아이 '은정’
초등학교 4학년 때, 내 앞에는 은정이, 내 뒤에는 민철이가 앉아 있었다.
은정이는 지역에서 잘 알려진 부잣집 외동딸이었다. 아버지는 큰 사업을 운영했다. 엄마는 학교에 자주 찾아왔다. 선생님과 교장선생님에게 살갑게 인사하며 학부모 모임에서도 영향력이 대단했다. 은정이 엄마는 언제나 세련된 옷차림이었다. 잔뜩 멋을 부린 머리 스타일에 은은한 화장, 손끝까지 신경 쓴 액세서리까지, 마치 TV 드라마에서 보던 부잣집 사모님 같았다.
은정이는 항상 비싼 옷을 입었다. 몇몇 부잣집 친구들과 어울렸고, 평범한 아이들은 가까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울타리가 있었다. 그녀의 필통 속에는 학교 문방구에서는 살 수 없는 학용품들이 가득했다. 모두 고급스럽고 신기한 물건이었다. 은정이는 친한 친구들에게 그런 학용품을 아무렇지 않게 줬다. 은정이니깐 가능했다.
하지만 문제는 은정이의 성격이었다. 외동딸로 자라서일까? 언제나 거만했고, 남을 깔보는 말투를 사용했다. ‘싸가지 없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아이였다.
민철이는 조용하고 착한 성격이었지만, 은정이와 함께 있을 때는 이상하게도 활발해졌다. 점심시간마다 둘이 장난을 치곤 했고, 나는 그들 사이에 끼어 애꿎게 피해를 보곤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 나는 조용히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은정이와 민철이는 나를 사이에 두고 밥알을 튕기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야! 하지 말라고! 밥 먹잖아!"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사고가 터졌다. 은정이가 튕긴 밥알 하나가 내 도시락 속에 떨어졌다. 엄마가 싸주신 밥과 색이 다른 밥알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아, 뭐야. 남 밥 먹는데. 밥 먹기 싫으면 나가서 놀던가.
"내가 하지 말랬잖아!" 나는 화가 나 소리쳤다.
그러자 은정이는 기세등등한 태도로 맞받아쳤다.
"뭐야, 네가 뭔데 소리 질러? 그냥 피하면 되잖아. 민철아 맞지?"
난 어이가 없었다.
"야, 밥 먹고 있는데 어떻게 피해? 말이 되는 소릴 해!"
은정이와 나는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민철이는 머뭇거리며 나와 은정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만약 그 녀석이 은정이 편을 드는 말 한마디라도 했다면, 아마 나는 참지 못했을 거다. 민철이는 그걸 아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은정이와 말싸움을 벌이던 중, 갑자기 은정이의 표정이 흔들리더니 이내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늘 거만하고 기세등등하던 은정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다니.
그동안 반의 남자애들이 모두 자기 발밑에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갑자기 울어버리니 나도 당황스러웠다.
그때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하필이면 재수도 없지. 평소 점심시간엔 거의 오지 않던 선생님이, 오늘따라 왜 지금 오는 거야. 선생님은 뒷문으로 들어오자마자 곧장 우리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다가왔다.
"은정아, 왜 그래? 누가 그랬니?"
선생님의 등장에 은정이는 더 서럽게 울어댔고, 그 순간 얄밉도록 큰 목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뜨니가 그랬어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울고 있는 은정이를 보니 정말 내가 죄인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선생님께 이 상황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조차 내겐 허락되지 않았다.
"너 당장 복도로 나가서 엎드려 있어! 남자애가 여자애랑 싸우고 울리고 뭐 하는 거야?"
먹다 남은 도시락을 그대로 두고 나는 복도로 걸어 나갔다. 엄마가 정성껏 싸주신 도시락이 아닌 억울함을 꾸역꾸역 삼키며 엎드렸다. 나무 바닥의 차가움이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복도를 오가는 다른 반 아이들의 시선이 따갑게 내 등을 훑었다. 속삭임이 귓가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모두가 나를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눈물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무 억울하고 분하다.
점심시간이 끝났는데도 내 책상 위에는 정리하지 못한 도시락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복도에서 오랫동안 벌을 서다 교실로 들어오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재빨리 도시락부터 정리했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더라면 어땠을까. 후회가 가슴 한구석을 아리게 했다.
그날 이후 민철이는 미안했는지 은정이의 장난이 지나칠 때면 더 이상 받아주지 않았다. 나 역시 은정이와 엮이는 건 결국 나만 손해라는 생각에 최대한 거리를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정이가 갑자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집안 사정으로 급히 전학을 갔다고 짧게 설명했지만, 동네에선 전혀 다른 이야기가 떠돌았다. 은정이 아버지의 사업이 크게 망해서 빚쟁이를 피해 한밤중에 몰래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후련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 씁쓸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사라질 줄은 몰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은정이는 희미해져 갔다.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만 갔다.
모두가 그렇게 잊어갔지만, 나만큼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억울함과 안쓰러움이 뒤섞여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는,
‘은정’이라는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