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6학년 때 희경이는 우리 반 반장이었고 나는 장난꾸러기였다.
어느 날 장학사님이 오신다고 해서 반 천제가 대청소를 하게 되었다.
나는 야외 화단의 잡초 뽑는 조에 배정되어 친구들과 쭈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고 있는데, 한 친구가 수곤 거렸다.
"저거 미니스커트 아니야?"
"미니스커트가 뭔데?"
나는 호기심에 물었다.
"야, 진짜 촌놈이네. 저기 봐, 희경이 치마. 엄청 짧잖아. 속옷이 보일 듯 말 듯하잖아. 저게 미니스커트야."
희경이는 창문 청소 조였다. 꽃무늬의 짧은 치마를 입고, 밖에서 열심히 유리를 닦고 있었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희경이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희경아, 애들이 너 치마 짧다고 얘기하더라? 속옷 보일 뻔했다고, 크크"
희경이는 얼굴이 붉어지며 소리쳤다.
"야! 치니, 너 진짜 죽을 줄 알아!"
"왜? 난 그냥 알려준 것뿐이야!"
"거기 서!"
나는 전력으로 도망쳤고, 희경이는 이를 악문 채 끝까지 쫓아왔다.
뒤돌아 볼 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빨갰다.
우리는 장난을 치며 어울렸고, 싸우면서도 가까운 사이였다.
술래잡기를 하던 날, 술래는 나였고, 마지막 남은 희경이만 잡으면 게임이 끝나는 상황이었다.
복도에서 도망치는 희경이를 따라 열심히 달렸지만, 간발의 차로 놓쳤다.
희경이는 토끼 굴을 찾은 것처럼 여자 화장실 안으로 쏙 들어갔다.
“빨리 나와!”
내가 문 앞에서 소리쳤다.
“내가 왜 나가? 나가면 잡히잖아. 히히, 약 오르지요!”
“이러면 반칙이야. 안 나오면 내가 들어간다?”
“한번 들어와 봐? 선생님한테 이를 거야!”
희경이의 도발에 욱한 나는 결국 화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야! 너 미쳤어? 여긴 여자 화장실이라고!”
희경이는 순간 얼어붙은 듯 멈칫하더니,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가 화장실로 숨으래? 따라와, 너 잡혔어.”
교실로 돌아오는 길, 희경이는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나는 못 들은 척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승자의 여유를 누렸고, 희경이는 볼을 부풀리며 나를 노려봤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수능 준비에 정신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토요일도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하고, 오후에는 시립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한 뒤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도 도서관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에는 짧은 단발머리에 명문 여고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서 있었다.
이상하게 시선이 머물렀다.
버스가 도착했고, 그녀가 먼저 탔다.
나도 그 뒤를 따라 올라가 자리를 찾다가, 우연히 그녀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희경이었다.
몇 년 만인가. 국민학교 때의 깜찍한 모습은 사라지고, 성숙한 여고생이 되어 있었다.
나는 순간 얼어붙었고, 그녀도 나를 알아본 듯했지만, 우리는 서로 모른 척했다.
예전처럼 쉽게 장난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뭔가 거리감이 느껴졌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잠깐 쉬려고 자판기에서 캔 음료수를 하나를 꺼내 들고 등나무 그늘 아래로 나갔다.
멀찍이 여고생 한 명이 앉아 있었고, 나는 무심코 그쪽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낯이 익은 여고생이다.
그녀가 희경이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얼른 몸을 돌려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피하지?’
그냥 인사하면 될 텐데, 왠지 쑥스러웠다.
우리 아파트로 가는 길은 인적이 드물고 외진 곳이라 밤엔 늘 조금 무서웠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희경이는 늘 나보다 먼저 버스에서 내려 앞서 걸었고, 나는 일정 거리를 두고 뒤따랐다.
몇 개월 동안, 우리는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정류장에서 집까지 걸었다.
눈인사조차 없이.
어느 날,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던 중 희경이는 친구를 만났다.
나는 스쳐 지나가려던 순간, 그녀가 힐끗 돌아보며 눈빛을 보냈다.
'너무 빨리 가지 마. 나 혼자 가면 무섭단 말이야.'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내가 네 호위무사라도 되냐?’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걸음을 늦췄다.
멀리서 희경이가 따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빨리 좀 와. 나 화장실 급하단 말이야.’
속으로 투덜거리며, 희경이가 아파트 단지 입구에 들어선 게 보이자 나는 전속력으로 집을 향해 달렸다.
수능이 끝난 겨울, 나는 아버지께 돈을 빌려 아파트 입구 도로변에서 군고구마 장사를 시작했다.
그날은 유난히 추웠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땔감을 끊임없이 넣으며 장작불을 피웠다.
장작불 냄새와 군고구마의 달콤한 향이 어우러진 연기가 자욱했다.
‘아, 춥다. 얼어 죽겠다.’
그때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섰고, 중년의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학생, 군고구마 3천 원어치 줘.”
“네.”
나는 봉투를 꺼내 고구마를 담기 시작했다.
그때 조용히 차 뒷유리가 내려가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치니야! 너 여기서 뭐 하냐? 푸하하하!”
희경이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너무나도 반갑게 내 이름을 불렀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른 듯, 국민학교 시절처럼.
나도 웃으며 말했다.
“어, 희경이구나. 나 알바 중이야. 하하.”
그 짧은 순간, 우리는 낯설지 않았다.
오랜 시간 말이 없었지만,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나는 군고구마를 종이봉투에 가득 담았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희경이의 웃음소리가 따뜻하게 퍼졌다.
희경이는 한참 나를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 진짜 반갑다. 안녕! 다음에 또 보자!”
차가 떠난 뒤에도 장작불의 냄새는 코끝에 맴돌고, 군고구마의 온기는 손끝을 녹였다.
그리고 그 애의 웃음소리는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에 오래도록 남았다.
겨울이 오면, 가끔 그날의 희경이 웃음소리가 떠오른다.
국민학교 동창생, 희경이는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겨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