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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가나 Oct 28. 2024

남편의 도시락 다이어리

변덕스럽지만 성실한 도시락

“내일, 점심 도시락 싸?”

“응...”

2020년 코로나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까지 우리 부부의 매일 잠자리 인사다.

4년 전 온 세계를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했던 코로나 팬데믹.. 그 공포의 코로나가 내 작은 주방에도 조용히 찾아와 이른 아침부터 이곳에 격리시키더니 끝끝내 남편의 점심 도시락까지 싸도록 조종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듯 남편의 점심식사도 웬만하면 회사 구내식당이거나 그게 물린다 싶으면 동료들과 근처에 나가 발길 닿는 음식점에 가서 한 끼를 해결하곤 했었다. 밖에 나가면 맛있고 다양한  음식들을 먹을 수 있으니 남편의 점심이 여러 의미로 참 감사했었다.

결혼 전까지 남편은 아침밥에 후식까지 챙겨 먹던, 집밥에 진심이신 시어머님 공로 덕분에, 나는 결혼과 함께 그 바통을 무겁게 받아 들고서 아침마다 게으른 기지개를 켜가며 졸린 걸음으로 주방을 향한다.

거하게 차려진 진수성찬이거나 진한 손맛의 엄마 밥상은 근처도 얼씬 못하지만, 두, 세 가지 차려진 반찬이라도 정갈하고 단정하게 차리려고 품을 들였고 책과 인터넷으로 남에 손맛도 적당히 빌려가며 소박하게 아침상을 차려냈다. 그리고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씩 섭섭지 않은 후식도 입에 넣어줘 가며 남편의 아침밥 구색을 맞추려 노력했다.

그렇게 매일의 아침을 차려 내는 건 습관이 됐지만 내 에너지는 여기까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바뀌어버렸다.

코로나라고 부르던 듣도 보도 못했던 바이러스 하나에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이다. 

모두가 집안에 격리되었고,  매일 뉴스를 챙겨보지 않으면 궁금하고 불안해 견딜 수 없는 길고 지루한 팬데믹이 시작됐다.

하지만 가장 공포스러운 소식은 남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보, 우리 팀은 다음 주부터 각자 점심 도시락을 싸와서 먹기로 했어. 집에 있는 반찬 대충 간단하게 싸줘.”

화장실 불 좀 꺼줘, 정도의 가벼운 뉘앙스로 전해온 남편의 도시락 선언. 세상에 ‘대충 간단하게’ 싸는 도시락은 없다. 제 아무리 백종원 아저씨도 이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쏟아져 나오는 감염환자와 사망자수로 두려웠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 흠.... 대신 아침이랑 메뉴가 같은 날이 많을 거야. 괜찮지?”

서둘러 인터넷으로 도시락통을 검색하는데 하고많은 것 중에 단단한 항아리 같은, 하필 손 많이 가는 4단 보온도시락이 눈에 들어온 건지.. 겁도 없이 바로 구매해 버렸다.

점심시간, 동료들이 싸 온 도시락들을 어깨너머 힐끗 구경할 걸 생각하니 반찬은 어떻게는 도시락통 가짓수에 맞춰보자는 것이 내 미션이었다.

기본적으로 국과 밥, 메인반찬 하나, 밑반찬 두 개를 싸주고, 준비한 반찬이 좀 더 있다 싶으면 메인반찬 용기에 작은 틈새 만들어, 그 틈에 꾹꾹 밀어 넣어 도시락에 힘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련의 작업도 코로나가 종식될 거라는 희망으로 묵묵히 견뎌낼 수 있었다.


그리고 꼬박 4번의 해가 바뀌고 독서실 같았던 식당 테이블 칸막이도 소리 소문 없이 자리를 내어 주고 떠난 지 오랜데,  난 아직도  매일 아침 구부정하게 어깨를 말며 조심스러운 젓가락질로 남편의 도시락통에 반찬을 담고 있다. 점심 가성비에 맛 들이고부터 남편은 여전히 나에게 도시락을 부탁한다. 가끔씩 동료들과 밖에 나가 먹을 때나 외근과 출장으로 점심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날도 있지만, 아직도 내겐 이 작업이 여간 신경 쓰이고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매일 정성스러운 도시락을 싸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른 만큼, 마음도 느슨해지고 언제나 내 상황과 컨디션이 중요한 변덕 심한 도시락이 된 건, 좀 오래된 얘기다. 

컨디션이 이만하면 되겠다 싶을 때는 형형색색 고운 김밥을 종종 싸기도 하고, 싱크대를 난리법석으로 만드는 잡채도 도전해 보기도 하며, 짭짤하게 단백질 섭취하라고 남편이 좋아하는 제육볶음도, 조금 불기는 해도 당면까지 넣어주는 찜닭도 준비해 둔다.

하지만 내 입에 밥 넣기도 귀찮은 날에는 냉동실 귀퉁이에서 뚝심 있게 자릴 지키고 있던 냉동 떡과 두유를, 그저께 사 온 빵들 중 맛있는 것만 골라먹고 냉동실에 가둬버린 빵을 꺼냈다가, 아.. 이건 조금 심했다 싶어 포도 몇 알을 곁들여주기도 한다. 또, 철마다 감자와 고구마를 시댁에서 보내주시면 시어른들의 땀의 수고를 모른 척할 수 없어 막내 아드님 도시락은 한정판 제철 다이어트 도시락, 찐 감자와 군고구마로 확실히 질리게 식단 관리 해드린다.


이런저런 마음으로 때로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준비한 도시락이지만 몇 년 동안 꾸준히 부지런을 떨었던 나의 성실함에 감동할 즈음, 우연히 남편의 핸드폰을 보게 된다. 사진첩에 ‘아내도시락’이라는 폴더가 있어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코로나 때 싸주기 시작했던 도시락을 지금까지 매일 마다 찍어 기록해 두었던 것이다. 

조각조각 이어진 사진들을 모아서 보니 감탄이 절로 나올만한 아름다운 비주얼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사진을 터치할 때마다 감탄은커녕 그날의 감정과 태도들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계란 프라이 하나 틱~ 얹은 김치볶음밥, 윤기 마른 어묵볶음, 아침에 한 솥 끓여놓고 먹었던 카레를, 점심 도시락통에 옮겨 담고 있던 모습들이 그려져, 다음 사진을 넘길 수가 없다. 

남편에 대한 애정과 감사가 없는 차가운 도시락이 말갛게 나를 쳐다보고 있으니 말이다.

귀찮아 대충 싼 도시락이란 걸 알면서도, 매일 거르지 않고 카메라를 들었을 남편, 그리고 그 식어버린 도시락을 꾸역꾸역 먹었을 남편.. 나의 수고를 더 알아주기만 바랬던 잦은 생색들이 민망해진다.

이젠 가끔씩 남편의 도시락 다이어리를 체크해 보자. 멋들어진 도시락은 흉내도 못 내지만 계란 프라이 위에 케첩 하트라도 찐하게 새겨, 수고하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흔적을 좀 남겨둬야겠다.

언제고 꺼내 볼 수 있는 남편의 도시락 다이어리가 식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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