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인도 생활을 돌아보며
“부모님이 인도에서 주재원 하셨나봐?”
인도 유학 갔다 왔다고 말하면 항상 듣는 말이다. 그때마다 부모님이 거기서 일 하시진 않았고 단지 인도를 좋아하셔서 인도 유학을 가게 됐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에게 인도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다.
어린 시절 인도에 대한 기억들
내 삶에서 때어놓을 수 없는 인도. 초등학교 4학년 때 인도로 유학 보낸다는 통보를 듣고 슬프게 울었던 기억이 난다. 보통 유학을 간다면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다고 들었는데 나는 왜 인도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유학가면 내가 알던 세상이 없어질까 두려웠다.
처음에 뭄바이공항에 내렸을 때를 잊을 수 없다, 인도만의 특유한 냄새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시야에는 폭죽 터뜨리는 소음과 연기, 뛰어다니며 소리 지르는 아이들, 릭샤의 진동, 그리고 축제가 보였다. 이렇게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곳에서 살아야한다는 생각에 항상 울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2년 넘은 인도 유학생활은 국제학교보다, 함께 지낸 누나들과의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른다. 부모님을 떠나서 2년간 누나들과 함께 살았는데, 그것은 마치 군대에 간 것처럼 누나들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나는 항상 긴장하면서 큰누나의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띠동갑인 큰누나는 지배자이고 억압자이며 법이고 제도였다. 그래서 나는 인도를 더 싫어했는지 모른다. 누나들이 인도가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하며 인도 친구 이야기를 할 때에도 인도란 나에게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인도신화에 나오는 ‘칼리’같이 무서운 큰누나, 조금 너그럽지만 그 너그러움을 거부하면 무서워지는 셋째 누나. 그들은 초등학교를 다니는 어린 시절 나를 지배하는 모든 것이었고, 인도 그 자체였다.
인도 유학 후 6년간의 이야기.
힘든 유학 생활을 보내니 한국에서 다니는 중고등학교가 즐거웠다. 인도에서 한 것만큼만 하면 걱정할 게 없었다. 적어도 나는 더는 인도와 연관 없이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인도 유학 갔다 온 후 인도는 나를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친구들은 인도에서 왼쪽 손으로 변을 처리하고 오른쪽 손으로 밥을 먹는 것을 흉내냄으로써 나와 친한 척했고, 나에게 왼손으로 악수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나를 스트레스받게 했다. 학교에서 나는 인도 원주민 취급을 받았고,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놀려대는 말에 상처를 받았다. 내성적이었던 나는 더 소심해졌고 때로는 아이들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인도를 피하면 더 놀림을 받았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인도를 피할 수 없다면 인도를 내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인도를 나의 단점이 아니라 장점으로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인도 다녀온 걸 자랑스럽게 여기며 나의 인도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좋아했다. 그러면서 친구들을 사귀었고 남들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인도는 아예 나의 컨셉이 되었다. 인도를 내 입시와 관련시키자고 생각했다. 그러자 인도는 내 고등학교 생활을 지배했다. 나는 경영학과나 인도학과를 가고 싶었고, 경영학과를 가더라도 인도와 무역을 주선하는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식으로 연결시켰다.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 3년간 인도학과를 위해 준비하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인도를 깊게 알게 되고, 인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친구들에게 인도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진짜 인도인의 입장에서 인도를 생각하자 인도의 신화나 문화, 전통 같은 것들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나를 원하는 대학은 없었다. 내가 입시를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인지 모른다. 불합격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공연히 인도가 증오스러웠다. 붙은 곳이 없어 갈 곳이 없으니 더 그랬지만, 사실 이미 그 전에 한국 대학에 가지 못하면 인도로 유학 간다는 게 가족간에 암암리에 결정된 사실이었다. 그러자 정말로 인도로 가기 싫어서 미칠 것 같았다. 6년간 쌓아올린 탑은 보잘 것 없어보였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에 우울증이 생겼다. 이런 상태임에도 부모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인도 유학을 강행했다.
다시 인도로 가는 길.
푸네의 게스트하우스에 누워 있으면 한국이 그립다. 친구들과 그 많은 곳을 얼마나 많이 누볐던가. 지금 나는 낯선 인도 하늘 아래서 생활하고 있다. 두 달간 학교를 다니다가 갑자기 코로나사태 때문에 게스트하우스에 갇히다 보니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나는 인도를 너무나 몰랐다. 초등학교 때에서 누나들이 알아서 밥 해주고 챙겨줘서 누나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혼자 인도에서 살다 보니 매일 밥해 먹고 설거지하고 숙소 정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모든 일을 스스로 해야 했다. 사실 이전까지 밥을 해본 적이 없었고, 내 옷을 스스로 개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매일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들을 반복하다 보니, 6년 전 매일 초등학생 동생에게 밥을 해줘야 했던 셋째누나가 어땠을까 떠오른다. 그때 셋째누나는 고작 고등학생 신분이었다. 지금 나보다 어릴 때였다. 그런데 누나는 동생 밥해 주면서 학교 다니고 공부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동생 둘을 인도에서 책임져야 했던 큰누나의 부담감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누나의 무서운 성격과 히스테리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되었다.
현재 내 나이는 예전 나를 돌봐준 셋째누나의 나이를 넘어섰고, 큰누나가 홀로 뭄바이로 와 게스트하우스에서 생활하며 로컬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 진학 문제를 알아보던 나이를 넘어섰다. 그런 점에서 두 누나가 대단해 보였고 내가 평생 고마워해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누나들 없이 혼자 살면서 스스로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을 책임져야 한다. 그동안 부모님이나 누나들의 질서 속에서 살았다면 지금 나는 내 기준과 질서를 만들어 생활한다. 판단을 바르게 하지 않고 행동을 조심하지 않으면 모든 게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나는 조금만 방심하게 되면 자꾸 게을러지고 무기력해진다. 그저 유치하게 대학수험표와 친구들 편지들을 꺼내보면서 질질 짜는 찌질한 사람이 되고 만다.
나는 더 이상 나태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이룬 게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인생을 혁명처럼 바꾸고 싶다. 그래서 먼저 게스트하우스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한국생활 6년 동안 아는 형과 누나가 없었지만,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인도에서 생활하기 위한 정보를 얻어야 했다. 그러자면 부끄러움이나 쑥스러움 따위 잊어버리고 갇혀 있는 다른 외국인과 좋은 관계를 지녀야 했고 여러 가지 상황을 질문해 공유해야 했다. 막상 그들에게 다가가게 되자 서툰 영어로나마 자신 있게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원래 사람들 많은 곳에서 말하기를 힘들어했는데 이제는 자신감이 붙었다. 어떤 점에서 생존의 방법을 배운 것이다. 심지어 스타벅스에 혼자 앉아있다가 새로운 인도 친구를 사귈 정도로 자신감이 붙었다.
인도에 와서 나는 새롭게 태어났다. 위기는 기회다. 무난하게 인도 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코로나사태로 인해 그것이 힘들어졌을 때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고 들여다보았다. 인도의 거리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끊어지고 몽둥이를 든 경찰들이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오지 않아야 감염병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 정부는 21일간 모든 걸 봉쇄하고 학교와 회사, 가게마저 못 나가게 막았다. 나는 쌀 20킬로그램과 물, 식료품, 바나나, 오렌지 등을 미리 샀다. 착한 인도 아주머니가 그 무거운 것들을 선뜻 차로 옮겨 주었다.
나는 혼자 밥 먹고 책 읽고 글을 쓰면서 나를 지켜나갔다. 엄마는 귀국하길 원하셨지만 나는 그렇게 원하던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기가 무서웠다. 돌아가면 다시 무너질까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나는 몸도 마음도 단단해지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인도는 나 스스로를 깨닫게 해주고 인간의 도리를 알게 해주고 나를 세워주며 위기에 처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나에게 인도는 ‘삶의 이유’를 알려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