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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비바체

Vivace : 아주 빠르고, 생기 있게

by 해이




봄이었다.

벚꽃이 교정에 흩날리던 날, 소영은 체육수업을 피해 강당 뒤편 창고 문을 열었다.

안에는 이미 누군가가 있었다. 매트 위에 누워 있던 같은 반 이진우.


“아... 미안.”


진우를 피해 창고 문을 여는 소영의 등 뒤로 진우의 낮은 음성이 흘러 나왔다.


“가지 마. 그냥... 여기 있어.”


마치 누군가에게 떠밀리기라도 한듯 소영은 엉겁결에 한쪽 귀퉁이에 쌓여있던 뜀틀 위에 걸터 앉았다.

좁은 창고 안은 먼지와 땀냄새, 고무 냄새로 아득해져왔다.

밖에서 들려오는 호루라기 소리, 꺄르르 웃는 소리, 구령 소리는 창고 안을 가득히 채웠지만, 소영의 귓가에는 닿지 못한 채 진우의 숨소리만이 그녀의 가슴께를 간질였다.


소영은 자꾸만 눈을 감은 진우의 얼굴로 눈이 향했다.

반곱슬의 머리카락, 짙은 눈썹, 높진 않지만 반듯한 콧대, 도톰한 입..술...

턱에서 머리카락으로 다시 속눈썹으로.

갓 돋아난 푸릇한 턱수염에 자신도 모른 채 귀끝이 빨개졌음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진우의 눈이 떠졌고,

소영은 놀라 뒷걸음질쳤다.

!!! 공과 라켓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체육선생님의 호통이 뒤따랐고, 둘은 결국 강당 청소를 함께 하게 됐다.



빗자루를 들고 서성이다, 소영이 먼저 물었다.


...너, 왜 거기 있었어?”

“그럼 넌?”


진우가 되물었다.


“피곤해서... 잠 좀 자려고.”

“나도.”


순간 피식 웃음이 터졌다. 마침 교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소영이 좋아하던 곡이었다.

SES "달리기" 였다.


진우가 작은 목소리로 따라 부르자, 소영은 무심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너도 이 노래 좋아해?”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듯한 느낌에 소영은 황급히 손을 놓고 달아났다.


“청소 다 했으니까, 난 간다!”


뒤에 남은 진우는 그런 소영의 등을 바라보며 멍하니 웃기만 했다.




그날 이후, 둘은 마주칠 때마다 괜히 웃었고, 방송에서 같은 노래가 흘러나올 때면 동시에 눈을 들어 서로를 찾았다.




봄은 그렇게 지나갔고, 여름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진우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병환으로 급히 서울로 이사 갔다는 소식만 전해졌다. 붙잡을 말도, 손을 내밀 용기도 없었던 소영은 그저 빈자리를 바라봤다.

여름은 길고 무거웠다. 하루하루가 느리게 흘렀다.



8월의 끝, 교내방송이 다시 울렸다.



코끝이 시큰해진 순간, 소영은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 교실 문 앞에 진우가 서 있었다.

햇살에 젖은 어깨, 수줍은 웃음.


“안녕? 잘 지냈어?”


짧은 여섯 글자 앞에서, 여름 공기가 반짝였다. 소영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심장이 다시 빠른 박자를 찾았다.



둘은 강당 창고 앞에 나란히 섰다. 문은 열려 있었다. 예전처럼.

안에 들어서자 냄새도, 공기의 눅눅함도 그대로였다. 다만 달라진 건, 함께 있는 시간이 더 편안하다는 것.


“그때, 네가 갑자기 손 잡았잖아.”


진우가 말했다.

소영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건... 그.. 그냥, 순간 그게 맞는 것 같아서.”

“나는 좋았어. 그래서 다시 와도 되나, 계속 고민했거든.”


무언가에 마비라도 된 듯 소영은 또 다시 진우의 숨소리만이 귓가에 퍼졌다.


공 하나가 굴러와 두 사람 사이에 멈췄다. 소영이 밀자 진우 쪽으로, 진우가 밀자 다시 소영 쪽으로. 그 간단한 놀이에 둘은 환히 웃었다.


“우리, 달릴래? 운동장 한 바퀴만.”

“지금?”

응, 지금. 더워서 좋고, 숨차서 더 좋고.”


둘은 나란히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뜨거운 고무 트랙이 발을 튕겼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이내 같은 박자로.

달릴 땐 생각이 필요 없었다. 발자국마다 박자를 만들고, 몸이 그 뒤를 따라갔다.


결승선 같은 흰 선을 지날 때, 둘은 동시에 멈췄다. 헐떡이며 웃었다.


“힘들다.”

“좋다.”


말이 겹치자, 둘은 더 크게 웃었다.


소영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내일도... 달릴래?”

“내일도, 모레도. 학교 다니는 동안은 계속.”


진우가 대답했다.


“그리고 방송에서 그 노래 나오면, 그냥 웃자. 아무 말 없이.”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내밀자, 진우가 잡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 딱 좋다 싶은 온도였다.


렇게 두 사람의 여름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빠르고, 밝고, 설레고, 힘찬.


비바체. 그 여름의 속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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