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지금처럼 막걸리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제 모습을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저 조차도 그러지 못했는걸요! 막걸리 공방이라는 곳은 또 얼마나 생소한지요. 전통주 교육 기관을 포함해서 전국의 막걸리 공방을 다 그러모아도 수십 개를 채우기 어려울 겁니다. 그래도 어떻게 하루하루를 넘기며 살다 보니 나름 구색을 갖추고 손님을 맞을 수 있게 되었어요.
오늘은 제가 막걸리 공방을 꾸리며 어떤 것들을 준비했는지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전에 해일막걸리를 찾아 주셨던 분들은 방문하셨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앞으로 해일막걸리를 찾아 주실 분들은 아직 실제로 보지 못한 해일막걸리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읽어주시면 나름 흥미롭지 않을까 생각해요. 혹시나 같은 업종 창업을 준비하시는 분이 있다면 미약한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해일막걸리는 순전히 제 추측으로 만들어졌고, 현실에 부딪히면서 채워 넣은 공간이랍니다. 막걸리 공방이란 게 레퍼런스 삼을 곳도 몇 되지 않고, 멘토는 더더욱 찾기 힘들뿐더러, 혹자에 따르면 사업성도 적어 보이는 일이기에 지원을 받기도 쉽지 않았거든요.
효율이나 논리와는 거리가 멀 수도 있지만, 제 경험을 토대로 말씀드려 볼게요. 상가를 계약하고 공간을 기획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한 건 막걸리 체험을 진행할 큰 탁자였어요. 탁자의 크기에 따라 최대 몇 명까지 체험을 진행할 수 있을지가 결정되거든요. 다행히 상가 크기가 생각보다 넉넉해서 꽤 큰 크기의 탁자를 들이기로 했습니다. 인테리어를 담당한 아빠와 상의하니 10인용 탁자도 들어가더라고요. 물론 양끝까지 의자를 둘 경우지만요.
탁자의 크기를 어림잡고 나니 나머지 공간 구획도 가능해졌습니다. 양조장을 어느 정도 크기로 뺄 지도 선명해졌고요. 그래서 직사각형의 공간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잠깐 알고 가시면 좋을 정보가 하나 있는데요, 사실 제가 임대한 곳은 시원한 유리 통창에(비록 이전 세입자 분은 불투명 시트지를 붙여 놓고 계셨지만) 전면 출입구가 두 개였어요. 하지만 왼쪽 유리문은 망가진 것처럼 보였죠. 그래서 왼쪽 문이 있는 곳을 막고 거길 양조장으로 쓰기로 했습니다. 동시에 통창 하나도 못쓰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그 후 아빠와의 논쟁(?)에서 패배하여 양조장 면적을 조금 줄이고 원래 수도관이 있던 위쪽 자리에 창고를 만들었죠. (지금은 창고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훌륭한 패배였습니다.) 그 옆에는 손을 씻을 수 있는 세면대를 설치했고요. (이 역시 패배하길 잘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대략 5분의 3 정도 공간이 남았는데요, 거길 이제 또 가로로 3등분합니다. 가장 안쪽은 싱크대가 있는 주방, 가운데는 아까 말씀드린 체험용 탁자를 놓을 곳, 마지막 바깥쪽 통창이 있는 부분은 훗날 막걸리 바를 열었을 때 추가 탁자를 놓을 곳으로요.
큼직한 인테리어를 마친 후에는 체험용 비품을 채워야 하죠. 먼저 의자, 당연히 사야 했습니다. 다만 제가 서서 진행할 공간도 확보되어야 하기에 탁자는 10인용이지만 의자는 8개만 갖췄어요. 그리고 최대 참여 인원인 8인에 맞춰 쌀과 누룩을 담을 그릇도 샀습니다. 채주 체험용 체망과 고두밥용 식힘판, 6kg를 한 번에 찔 수 있는 커다란 찜기도 구매했습니다. 이전에 공유 주방에서 체험을 진행할 때 사둔 앞치마와 보울, 샤주머니, 인덕션, 국자, 컵 등은 그대로 쓰기로 했고요.
체험 재료인 찹쌀, 누룩, 물도 준비했죠. 아, 온전한 공간이 생기면서 생수 대신 정수물을 비커에 받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낭비되는 플라스틱 병이 줄어들어 기뻤습니다. 참여자가 9인 이상일 땐 원활한 진행을 위해 생수를 쓰긴 하지만요. 그 밖에 막걸리 통과 체험 기념품, 키친타월 같은 소모품도 창고에 잘 정리해 뒀어요.
소품은 따로 사지 않고 선물 받은 것들과 이미 갖고 있던 것을 활용했습니다. 딱 하나 구매한 게 있다면 체험 진행 시 배경 음악을 틀 스피커였어요. 인테리어 콘셉트와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골랐죠. 그리고 카드 결제 단말기는 휴대용으로 선택했어요. 처음에는 설치형으로 할까 고민했는데, 외부 공간에서 현장 결제를 해야 할 일이 생기더라고요. 휴대용 포스기라 보다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어서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하루체험을 위한 구비는 이 정도로 얼추 완료되었는데, 매주해막을 진행하게 되면서 살 거리가 더 늘어났어요. 접시와 포크, 주걱, 깔대기는 물론 1~2kg 술 담금을 위한 작은 유리 발효통부터 10갤런짜리 스테인리스 발효통을 사고, 발효통을 둘 대형 선반도 사야 했습니다. 8인 이상의 단체 체험도 진행하게 되어서 원목 탁자와 간이 테이블을 추가로 구매했고요.
참고로 체험 프로그램도 새로 꾸렸습니다. '도깨비 막걸리 만들기'는 계속하되, 9인 이상 단체용 '살피재 고개 넘는 막걸리 만들기'를 추가했죠. 막걸리 설명과 만들기 이외에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간단한 유희 요소가 있어요.
제가 지금까지 나열한 공간과 물품들이 그려지시나요? 작아 보이는 해일막걸리 안에 이렇게나 많은 것들이 꽉꽉 채워져 있답니다. 처음 시작할 땐 이렇게나 많은 것들이 필요할 줄 몰랐는데 말이에요. 아직도 사야 할 게 좀 남은 것 같아 무섭긴 해요. 20L 정도 중간 사이즈의 발효통도 갖춰 두면 좋을 것 같고, 발효실 역할을 하고 있는 양조장 온도를 지켜줄 냉온풍기도 설치해야 하거든요. 욕심을 더 부리자면 모니터도 하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일단 참아 봅니다.
물건을 사느라 길어진 영수증만큼 글이 기네요. 야심 차게 구비해 둔 물품들을 온전히 쓰겠다는 다짐과 원하는 물품을 망설임 없이 추가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승승장구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