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
새로운 체험 콘텐츠 준비와 외부 강의 준비를 하다 보니, 여러 사료를 통해 막걸리를 비롯한 우리 술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발견하곤 합니다. 술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맞닿는 느낌도 들고요. 그렇게 알게 된 이야기 몇 가지들을 여러분들과 나눠볼까 해요.
1. 1918년 37만여 명이었던 자가용주 제조자는 단 13년 만에 1명으로 줄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가양주 문화였습니다. 말 그대로 집집마다 술을 만들어 마셨죠. 곡물을 발효시켜 만든 우리 술은 된장이나 김치 같은 발효 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시작되면서 민족 문화 말살과 자금 수탈 목적 하에 술에 세금이 매겨지게 됩니다. 술을 만드는 사람은 무조건 세금을 내야 하고, 그전에 정식 면허를 취득해야만 했죠.
주세법은 1909년 처음 제정된 이래 지속해서 강화되어 1916년이 되면 더욱 엄격한 주세령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1918년 조사 결과, 국내 주류제조장 9만 951개와 자가용주 제조면허자 37만 5757명이 강력한 규제 아래서 살아남은 것으로 밝혀졌어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주류 제조를 포기하게 됩니다. 특히 집에서 술을 빚을 수 있는 자가용주 제조면허자는 1931년 단 1명만 남게 됩니다. 전국의 주류제조장도 4,670개로 줄어들어 늘어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대형 양조장만 버틸 수 있게 되죠.
해방 이후에도 가양주는 한동안 금지되었습니다. 지금처럼 집에서 술을 빚을 수 있게 된 건 1995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답니다.
2. 탁주를 마시는 자는 붙잡히고, 청주를 마시는 자는 무사하다.
청주(약주)와 탁주는 한 술독에서 나오지만, 아무래도 여겨지는 가치는 달랐습니다. 윗부분이나 용수에 고인 맑은 부분을 조심스럽게 떠낸 술은 귀하게 취급되었고, 남은 탁한 앙금에 물을 더 부어서 만들었던 술은 아무래도 서민과 함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수는 낮아졌지만 양이 많아졌고, 어느 정도의 허기도 채울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니 세종실록에 '탁주를 마시는 자는 붙잡히고, 청주를 마시는 자는 무사하다'는 관용구가 등장하더군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예부터 유구했다는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3. 관악구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향온주 기능장이 계셨다.
향온주는 향이 뛰어나고 녹두누룩을 사용한 것이 특징인데요, 궁중에서만 빚어 먹었던 특별한 술이었습니다. 녹두 특유의 효능 덕분에 약으로도 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부 부서 중의 하나인 양온서에서만 이 술을 제조했다고 해요. 왕에게 올리는 술이라 제조법 또한 극비에 부쳐져 구전으로만 내려왔다고 하는데요. 일제강점기 이후 영영 사라진 줄로만 알았다가, 하동 정 씨 집안에서 가양주로 향온주를 빚어 오던 덕분에 현대에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 다행이죠? 해일막걸리가 자리 잡은 관악구에 1대 향온주장인 정해중 선생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2대 향온주장인 박현숙 선생님께서 명맥을 이어오고 계시는데요, 옛 녹두누룩을 재현하기 위해 10년간 100가마니가 넘는 녹두를 사용하셨다고 합니다. 이따금 전통주 행사가 열리면 이 귀한 향온주를 맛볼 수 있다고 하니, 저도 기회가 되면 한번 꼭 맛보고 싶네요.
4. 막걸리 빚기는 국가무형문화재다.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실 듯한데요, '막걸리 빚기'는 2021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제144호로 지정되었답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국에 걸쳐 빚어 왔던 가치가 인정되었다고 해요. 특별한 건 우리 국민이 직접 국가무형문화재로 제안하여 등록된 첫 사례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놀랍게도 막걸리를 빚으시는 여러분은 국가문화유산을 계승하고 계신 거랍니다. 이외에도 김장이나 장 담그기, 떡 만들기, 활쏘기 등 여러 우리 문화가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요. 막걸리 빚기 이전에 전통주 세 가지가 이미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었는데, 바로 문배주, 면천두견주, 경주교동법주랍니다. 이 세 가지 술은 생각보다 쉽게 구하실 수 있으니,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내어 드리면서 술에 얽힌 이야기를 함께 들려 드리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5. 근대 양조장은 마을의 중심이었다.
술 이야기에 양조장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죠. 높은 최소 생산량을 요구하는 일제의 주세 정책이 시작된 후, 우리나라 양조장은 점차 대형 상업 양조장 중심으로 개편되어 왔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술을 쉽게 구해야 했고, 세무서 입장에서도 단속과 과세가 편해야 했기 때문에 근대의 양조장(그 당시에는 주조장이라고 더 많이 불렸다고 해요.)은 보통 시가지에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때 현금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돈이 자주 돌던 곳이 바로 양조장이었다고 해요. 회사라는 개념이 흔치 않을 때부터 '술 회사'라는 이름을 가졌을 정도로요. 특히 농촌에서는 양조장과 방앗간이 돈 많은 부자를 대표했다고 합니다. 지역 사회와 산업의 중심이었던 만큼 양조장도 지역 주민들을 후원하거나 도로를 위해 토지를 제공하는 등 지역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제가 바랐던 공존의 삶이 아주 예전부터 이어져 왔군요.
술 공부를 하며 또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