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가 드디어 세상에 나오다
정말로, 새봄의 시작과 함께 새 막걸리가 출시되었습니다.
이번에 선보이는 막걸리는 총 4가지 종류로, 각기 다른 맛과 향을 지니고 있답니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해일막걸리, 해막홍실, 해막청아, 해막굴참이에요. 도수는 모두 9도로 너무 독하지도, 너무 밍밍하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용량은 325ml. 막걸리치고는 적은 양인데요, 식사하실 동안 가볍게 한 병 비우기 적당합니다. 참, 소비기한은 제조일로부터 45일이에요. 하지만 후발효가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저는 3주 안에 드시는 걸 추천합니다. 단맛이 적고 씁쓸한 맛을 즐기신다면 그 이후도 괜찮아요. 이번 첫 배치는 모두 합쳐 약 300병의 막걸리가 나왔습니다. 마지막 병까지 모두 쇼케이스에 채워 넣었던 일요일 밤, 울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입니다. 3년 전만 하더라도 여기까지 올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거든요.
따지자면 제가 막걸리를 빚어 팔겠다는 생각을 한 건 회사를 다니고 있을 때부터였습니다. 막걸리를 매일 마시는 일상을 살 지도 않았고, 막걸리가 없으면 죽음을 달라는 각오도 없었는데요. 그냥 조용히, 혼자서 사부작거리며 생존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떠올리게 된 가벼운 계획이었습니다. 막상 막걸리를 생산하는 일은 딱히 조용하지도 않고, 어마어마한 체력이 필요하지만요!
그리고 운 좋게도 여러 기회가 잡혀서, 지금까지 해일막걸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백 하나 할까요. 전 해일막걸리가 얼마 못 가 실패하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실패할 것 같은 일을 굳이 시작한 이유는 어차피 실패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미리 실패에 점을 찍어 둔다면 소위 '성공'하기 위한 압박과 조급을 느낄 필요 없으니까요. 평균, 혹은 평범의 궤도에서 쫓겨났다고 느꼈던 날, 왜인지 다시는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예 걸어보지 않았던 길로 향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저에게는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고, 이왕 쓰기로 한 시간에 무엇을 한들 괜찮았죠.
얼마간 내가 마음 편한 대로 하자는 마음으로 출발한 창업이었습니다. 일이 잘 풀리면 좋겠지만 안 풀린대도 세상에 일이야 많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요. 나는 청소도 할 수 있고, 설거지도 할 수 있고, 짐도 나를 수 있으니까. 그러니 해일막걸리는 생계도 아니었고, 자아를 실현한다는 의미도 크지 않았습니다. 이제와 결론을 내보자면 치유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어느덧 3년 가까이 해막과 함께 하면서 당장 내일 세상이 끝나도 상관없었던 지난날이 아득해져 갑니다. 삶을 지속할 의미를 찾지 못했던 날도, 미래가 전혀 기대되지 않았던 날도, 숨 쉬는 오늘이 너무나 벅찼던 날도, 눈을 뜰 때마다 도착해 버리는 내일이 부담스러웠던 날도 모두 어제가 되었죠. 아직도 가끔씩 의지와 상관없이 동요할 때면, 그러니까 어쩌다 계단에 몸을 던져 구르고 싶은 순간이 찾아와도 내일 예약한 손님이 올 텐데, 하며 날 선 층계를 지나칠 수 있는 건 전부 해일막걸리를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해일막걸리에서 하고 싶은 일이 점점 늘어나고, 욕심이 생기고, 꼭 도달하고야 말겠다는 목표가 떠오르는 게 재미있어요. 그중 하나가 지속가능한 막걸리 양조장이고요. 이 역시 제 마음을 우선으로 두고 작업했습니다. 저는 달콤하고 탄산 있는 음료를 좋아하니까, 막걸리 역시 유행을 분석하기보단 제 취향에 알맞은 맛과 향으로 기획했어요. 도수를 9도로 설정한 이유도 가수를 많이 해서 7도 이하로 떨어뜨린 막걸리는 제 입에 싱겁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다른 요소도 마찬가지예요. 낭비와 오염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제조업이기에 아주 조금이라도 영향을 덜 끼치고 싶어서, 굳이 몇 배는 더 비싼데 안정성은 떨어지는 공용 유리병을 선택했죠. (그래도 예쁨을 얻긴 했습니다.) 작년에 비해 작황이 좋지 않아 쌀값이 많이 올랐는데도, 지지의 마음을 담아 유기농 멥쌀로 술을 빚고, 풍성한 단맛을 위해 찹쌀을 더했습니다. 거창한 라벨도 원하지 않았어요. 그냥 주표시면과 정보표시면을 합쳐 면적을 확 줄여버렸습니다. 시중 막걸리 중에 저희 막걸리 라벨이 제일 조그마할지도 몰라요.
가득 남은 이야기는 주제를 나눠 차차 들려 드릴게요. 이번 주 월요일에 막걸리 정식 판매가 시작되었고, 저는 3월 동안 매일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손님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작년에 미리 만들어 두었던 시음잔도 드디어 인사를 드리고 있죠. 체험만 운영할 때는 예약에 맞춰 굉장히 유연한 삶을 살았는데, 이제는 고정된 시간과 일이 생겨 무언가 생경한 느낌입니다. 부정적인 뜻은 아니고, 더 착실하게 사는 기분에 가까워요. 차차 해일막걸리가 안정기에 접어드는 것도 같습니다.
관심과 사랑을 주신 덕분에, 막걸리 쇼케이스의 한 칸은 벌써 거의 비워져 가고 저는 두 번째 배치의 밑술을 담아 두었습니다. 지나간 시간만큼 해일막걸리의 묵직한 누룽지 맛은 가히 펀치라고 불러도 될 만큼 강해졌고요, 해막굴참의 산미는 슬며시 녹아 맛의 밸런스가 훨씬 자연스러워졌습니다. 궁금하시면 언제든 시음하러 오세요. 다음 주에도 변함없이 신림동에서 문을 열고 있을게요. 그리고 소망컨대, 다음 달에도, 다음 해에도, 어엿이 해막의 자리를 지키고 있기를 바라요.
- 지나친 음주는 뇌졸중, 기억력 손상이나 치매를 유발합니다. 임신 중 음주는 기형아 출생 위험을 높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