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호>
"셋 , 둘 , 하나... 건배!!"
태어나서 들었던 어떤 말보다 설레는 한마디였다. 새해가 되던 날 중학교 동창 녀석들과 동네 주점에 들어가 술잔을 부딪쳤다. 모두 술집에 모이기로 한 듯 모든 주점은 꽉 차 있었고 우리 동네에서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가서야 겨우 한적한 포차를 찾을 수 있었다.
당당히 민증을 내밀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때려왔다. 루이비똥 누나들의 짙게 뿌린 향수 냄새, 마른오징어와 콘치즈 냄새, 쓰디쓴 쏘주냄새와 지독스러운 담배냄새가 뒤엉켜 코를 간지럽혔고, 이를 무슨 냄새라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청춘’ 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어른들이 항상 입 모아 말씀하시던 ' 꽃다운 시절 ' 의 청춘 (靑春)의 향과는 거리과 꽤 멀었지만 이런 풍경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잠에서 깨어난 나비가 세차게 꽃밭을 누비듯 어른으로써의 변태만을 기다려온 우리들은 청춘 냄새 진동하는 꽃밭에서 세찬 날갯짓을 시작하였다. 그중엔 소리를 지르는 이들, 노래를 부르는 이들, 심지어 춤을 추는 이들도 있었다. 포차에 술에 잔뜩 취해 오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이날 처음 알았다. 나도 질 수 없지 싶어 있는 힘껏 크게 소리 질렀다
“ 야 새!! 해!! 복!! 많!! 이!!! 바아아앋!!! 아라!!!!! "
술잔을 기울일수록 모든 순간들이 기억 속에서 스쳤다. 이 대체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위한 향수인지 흐릿해진 기억을 끄집어내려 애썼지만 얼마 안가 그만두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지 않은가. 어른들만의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이해하다니 진짜 어른인가 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날 우리가 들어갔던 포차 이름도, 같이 흥얼거린 옆 테이블의 건배사도, 천장을 뒤덮었던 퀴퀴한 냄새조차 모두 기억나지 않지만 나에게도 남부럽지 않은 새해가 있었다는 사실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탕자 생활을 즐기며 정신없이 놀다 보니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 어른이 되면 뭔가 달라지겠지, 철도 제법 들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지겠지 ’ 떠올리며 세웠던 새해 목표들은 하나도 지키지 못한 채 2월이 찾아왔다.
그리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달라진 것이라고는 홀쭉해진 지갑과 알코올로 뚱뚱해진 나의 아랫배, 오로지 그뿐이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다짐하며 그 끝자락에 묻어두었던 나의 부끄러운 면모들과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다시 슬그머니 나타나면서 여전히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대체 무엇이 달라질 거라 생각했는지 생각을 해봐도 생각나지 않아 생각을 멈춰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쏘주를 삼키는 날만 늘어간다.
그래도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난 이제 어른이라는 것이다. 절대 끼지 않을 것만 같았던 2호선 일개미들의 전쟁터에 발을 디딜 날이 올 것이고, 점점 책임감의 무게가 더해져 어깨가 굽어지는 날이 올 거다.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만난 모든 인연들엔 꼬리표가 붙어 있었으며 그날로부터 난 다시 한 살이 되었다. 함께 모여 밤을 지새웠던 친구들 역시 나와 같은 고민들로 밤을 태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 우리는 외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해야만 했고, 그것은 도망칠수록 바짝 좇아왔다. 다 같이 모여 동네 구석진 피씨방을 가던 친구들이 각자의 고민을 품으며 하나둘씩 떠나갈 때 “아 이제 진짜 어른이 되었구나” 싶었다.
이제 만날 기회도 줄어들어 서로를 잊고 살겠지만 그래도 그들과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공유하며 살아간다. 꼬리표가 붙지 않는 유일한 이들, 나의 서툴었던 10대를 함께 공유했던 이들. 나중에 멀어지더라도 그때 그 순간은 그 순간으로 기억하고 싶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