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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바다 Apr 07. 2021

수면 패턴

제목 짓느라 꿈에서도 일하는 수많은 편집자들을 위해

  

나의 수면 패턴에는 별 특이점이 없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흔하고 전형적인 올빼미족이라는 사실밖에는. 대학 시절처럼 시간이 남아돌던 때는 괜히 밤에 감성적이 되어서 싸이 블로그나 다이어리에 글도 쓰고 그랬다. 물론 아침이면 비공개로 돌려놓았고. 그러다 스물다섯부터 경기도 시흥에서 서울 마포로 출퇴근하려다 보니 매일같이 아침 다섯 시 오십 분에 일어나야 하더라. 나의 본성과 다른 패턴으로 살아가려 하니 스트레스였는지,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않아서 변비가 잦았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콩나물시루처럼 사람이 빽빽한 버스에 타야 하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어느 날인가는 흔들리는 버스 손잡이를 힘겹게 붙잡고 있다가 생각했다. ‘아, 이럴 거면 그냥 결혼해서 편하게 사는 건 어떨까. 일 힘드네.’ 그로부터 딱 10년 뒤, 나 지금 기혼인데…     



결혼 유무와 관계없이 사는 것은 만만치 않다. 억지로 아침형 인간으로 돌려놓은 수면 패턴을 10년이 지나도록 유지하고 있다. 공부를 하지 않던 문과생으로서 펑펑 놀던 대학 시절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일하다 보면 꿈에서 일을 하는 ‘뭐 같은(!)’ 일이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다. 자면서 제목을 짓는 일도 있었다. 편집자로 일하는 나는 출간 시기가 오면 책의 제목을 정해야 한다. 많은 편집자가 공감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데, 타이틀과 부제를 정하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편집자인데, 내가 쓰는 표현은 왜 이리 상투적일까) 내 아기가 태어나면, 아마 이름을 짓는 데 엄청난 공을 들일 것이다. 평생 불릴 이름이니까. 책도 마찬가지다. 내가 제목을 붙이면 그 책은 생명을 다할 때까지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이름 때문에, 이름 덕분에 책이 흥하고 망했다는 소리도 아주 자주 듣게 될 테다. 

원제가 『PLATO’S ALARM CLOCK』인 외서의 출간을 앞두고 한참 제목을 고민하던 때의 일이다. 일각에서는 정직하게 ‘플라톤의 시계’로 가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이 있었다. 다른 뾰족한 대안은 없는데 진짜 그 제목으로 나오면 망할 것 같아서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는데 갑자기 제목 하나가 불현듯 떠오르는 게 아닌가! 『방구석 박물관』! 무릎을 탁 치고 회사에 아이디어를 내밀었는데 사실 그 제목은 한창 잘나가던『방구석 미술관』의 아류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그 책은 ‘방구석 박물관’으로 불리게 되었다. 책의 생명이 다하는, 저작권사와의 계약 기간인 5년 동안 그러할 것이다.      




가끔은 자다가 고민이 해결되는 일도 있다. 다니던 회사에서 이직을 하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렸던 적이 있는데, 심지어 신혼여행 중에도 이력서를 여기저기 다 넣어 보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몇 달 뒤에 운 좋게도 1차 면접에 두 군데 합격하여 지금 다니는 회사와 다른 회사를 저울질하는데, 우리 할머니가 꿈에 나왔다. “회사 옮기려면 두 가지를 봐. 큰 회사, 그리고 점심밥은 주는 회사에 가렴.” 할머니 계시대로 나는 다니던 곳보다 규모가 더 크고 점심밥을 주는 회사로 이직을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쭈구리처럼’ 일하는 중이다. 내가 ‘출판밥’ 11년 차라 경력은 무거운데 사실 별로 아는 게 없다. 잡지, 학습 만화, 청소년서, 성인서를 너무 두루 경험해서인지 단 하나에도 강점이 없는 것 같고, 뒤늦게 성인서로 뛰어들었으니 연차 대비 모르는 것투성이다. 오늘만 해도 온라인 서점의 수많은 단어와 문장의 홍수 속에서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하고 남이 쓴 것만 베껴 보려다가 시간이 다 흘러가 버렸다. 편집자는 책을 출간하고 나면 보도자료를 써야 하는데, 보도자료란 쉽게 말하면 책을 멋들어지게 소개하는 광고 페이지다. 각 신문사로 책이 도착하면 기자들은 제일 먼저 편집자가 쓴 보도자료를 살펴볼 것이다. 책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의 문장력은 부족하다. 남이 쓴 보도자료들을 늘어놓고 문장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압도당하다, 불편한 진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적나라하게, 단단하고 빛나게 만들며, 예측 불가능한, 날카롭게 지적한다, 거스를 수 없는 위기, 민낯을 완성하다…’ 바라는 것이 있다. 오늘은 자면서 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직할 때 처음에 이력서에 이렇게 적었다. ‘나무 한 그루의 가치를 소중히 하는 편집자가 되고 싶습니다.’ 내가 신뢰하는 편집자 언니는 그 문장에 줄을 슥슥 그었다. 자신 없어 보이는데 이런 말을 굳이 적지 않아도 좋겠다고. 정확한 코칭 덕분에 다른 문장으로 바꿔서 이력서를 냈고 지금의 회사에 합격했지만, 사실 그건 진심이다. 비록 지금은 남의 문장을 베껴서 보도자료를 어떻게든 완성해 내려고 발버둥 치는 ‘쭈구리’지만, 언젠가는 모든 문장을 내 것으로 소화하고 싶다. 작가에게, 독자에게, 나무에게 덜 미안한 책을 만들고 싶다. 

잠을 자면서 일하고 싶진 않지만, 꿈을 꾸고는 싶다. 직업인으로서 지금보다 더 나은 편집자가 되고 싶다는 꿈은 꿀 수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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