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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바다 Apr 07. 2021

마음에 걸리는 것

마지막을 모르고 하는 실수들

      

“얘, 아무래도 네가 좀 집에 와야겠다. 마음이가 힘이 없어.”

수화기 너머로 십 년을 길러 온 강아지가 아프다는 엄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때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지 한 달이 채 안 되었을 때였다. 결혼식 두세 달 전에 마음이의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가끔 나 없을 때 기절한 적도 있다고 했다. 동네 동물병원 의사 선생님은 망설이면서 이야기했다. 앞으로 한 달에 15만 원이 넘는 치료비가 꼬박꼬박 나갈 것이라고. 치료 비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래도 잘 먹여 보기로 한 지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의학의 힘은 대단하니까 약만 먹이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제부터는 아예 밥을 먹지 않는다고 했지만, 더운 여름이라 식욕이 떨어져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낮에는 아빠와 같이 식욕을 촉진하는 주사도 맞고 왔다고 했다.

“왜, 좋아하는 가족이 갑자기 눈에 안 보이면 동물이 앓는다고 하잖아. 그런 거 아닌가 걱정이 돼. 네가 좀 와야 될 것 같아.”

그날은 금요일이어서 차가 막힐 게 뻔했다. 금요일은 교통 정체가 심하다는 내 말에 엄마는 그러면 안 와도 된다며 말을 흐렸지만, 결국 친정에 가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마음이는 나와 꼬박 10년을 함께한 강아지였다. 여름 휴가길에 버려진, 아니 어쩌면 애초에 주인이 없었을 조그만 강아지를 동물병원에 데려가서 검진을 받게 하고, 그 작은 배에 가득한 기생충을 치료하고(나는 그때 기생충이 그렇게 징그럽게 생겼다는 걸 처음 알았다), 집에 와서 무작정 이 강아지를 기르겠다고 부모님께 엄포를 놓았었다. 당연히 엄마는 팔짝 뛰었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나의 한 마디에 허락하셨다. “엄마, 나 요즘 우울한 일도 많고 그래. 얘가 있어야 내가 웃을 수 있을 것 같아.”

데려오기만 하면 내가 다 기르겠다고 했지만… 엄마가 밥을 주고, 아빠가 씻기고 산책도 시키고, 나는 그저 예뻐했다. 0.8kg던 마음이는 어느덧 5kg가 넘었고, 나는 대체 이 강아지가 어디까지 자랄 것인지 걱정이었다. 처음에 데려간 (기생충을 치료한) 동물병원에서 커 봤자 10kg라더니, 정말 우리 마음이는 딱 9kg 정도에서 멈추었다. 나는 그런 마음이를 두고 ‘우리 집에서 기를 수 있는 강아지의 마지막 크기’라며 좋아했다.

엄마는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주인 좋다고 다가오는 동물을 마다할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인 것 같았다. 아빠는 원래도 동물을 좋아하는 터라, 동물을 기를 때의 귀찮은 일은 모두 아빠 전담이 되어 버렸다. 산책도 아빠 차지였다. 동물이 한창 팔팔할 나이인 2~3살 정도에 아빠는 논밭길을 걸어, 옆 동네로 마음이와 산책을 했다. 그래도 눈빛이 초롱하고 지치지 않은 때가 있었다. 나도 그 논밭길을 마음이와 여러 번 같이 갔다. 자동차 없는 안전하고 어두운 논밭길을 마음이와 냅다 뛰며 누가 이기나 내기를 했다. 강아지가 아니면 절대 산책을 같이 하지 않을 우리 가족은 강아지 때문에 함께 바깥에 나갔다. 함께 길을 걸으며, 밤공기를 마시며, 굴러들어온 마음이라는 강아지는 그렇게 우리의 일상의 모든 장면에 스며 있었다.      




친정에 온 나는 마음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낮에 병원에 멀쩡히 잘 갔다 왔다던 강아지가 바닥에 누워서 꼬리만 겨우 흔들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반가움에 흔들리는 꼬리가 보였다. 나는 마음이를 일으켜 세우고 싶었지만, 혹시나 아픈 강아지가 예민하게 반응할까 봐(물릴까 봐) 만질 엄두를 못 냈다. 사료를 줘도, 평소 좋아하던 간식을 줘도, 물을 줘도, 다 먹지 않으니 단단히 탈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두 시간을 운전해 달려온 나는 밥부터 먹기로 했다. 밥공기를 싹싹 비워 갈 즈음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빠였다. 그리고 드디어 마음이가 일어난 것도 아빠가 와서 자리에 앉은 바로 다음이었다.

마음이는 쌕쌕 숨을 몰아쉬었다. 목이 마른 것 같았다. 얼른 물그릇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더니 겨우 목을 축였다. 우리 사이에서는 병원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병원에 데려가면 이번에는 돈이 진짜 많이 들 것이라는 말에 나는 그래도 어쩌겠느냐 데려가야지, 죽게 두느냐 하고 소리를 쳤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대체 내가 강아지 치료에 돈을 얼마까지 쓸 수 있을지 셈해 보았다. 그 순간, 갑자기 마음이가 쓰러졌다.

아무도 그것이 마음이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인간은 죽음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기르던 강아지도, 사랑하는 가족도, 그리고 나조차도 언젠가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아는 듯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 따위는 우리 자신에게 절대 벌어지지 않는 듯 살아간다. 누가 큰 병에 걸렸대, 누가 세상을 떠났대, 하는 말이 들리면 참 무섭다고 몸서리를 치지만 그뿐이다. 물론 하루 종일 죽음이라는 생각을 떠안고 사는 것은 너무 불행할 테니까 이해한다.

문제는 소중한 존재가 언제든 나를 떠날 수도 있다는 그 엄연한 사실을 중요한 순간에도 애써 잊어버린다는 데 있다. 마음이는 어땠을까. 매일같이 나를 깨우던 강아지가 도무지 몸이 예전 같지 않고 밥도 먹기 힘들어졌을 때, 나를 자주 찾지는 않았을까. 강아지의 세 달은 사람의 1년 정도 된다는데, 이놈의 누나가 왜 이렇게 집을 비우는지 궁금해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힘든 날에 드디어 내가 왔는데, 만져 주지 않아서 슬프지 않았을까. 내가 밥그릇을 싹싹 비우느라 내 얼굴을 더 볼 수 없어서 조금 서운하지는 않았을까. 마음이는 내가 자기 마지막 순간까지 병원비를 셈해 봤다는 건 모를 거다.

그런 게 끝끝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인데, 그날이 마지막인 줄을 모르고 내가 했던 그 많은 잘못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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