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반투명 인간이다.
투명 인간도 아닌 반투명 인간은 뭐냐고? 일로도 정체성으로도 애매하게 비가시적인 삶을 살아온, 보이지도, 안 보이지도 않는 레즈비언 번역가라는 반투명 인간. 이 글은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한 사람의 담담한 고백이자 생존의 기록이다.
번역이라는 일은 아주 반투명한 작업이다. 작가의 작품과 말을 옮기며 그것들이 가장 빛날 수 있게 도우면서도 번역가는 절대 앞으로 드러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은 또 어떠한가. 말하기에도 입 아픈 주제다. 사회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말 그대로 반투명한 2등 시민이 아닌가?
나는 번역가이면서도 번역가가 아니기도 하다.
누군가 내게 “번역가세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네니오.”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정확히 말하면 번역가의 탈을 쓴 무언가라고 하겠다.
무명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번역가.
그렇다면 나는 실패했나?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님께서는 꿈은 명사가 아닌 동사로 말해야 한다고 하셨다. 앗, 다행이다. 아직 희망이 있다! 완벽한, 잘나가는 번역가라는 명사로 말하면 나는 실패자겠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들을 동사로 쓰면 우리말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행위라고 아주 폭넓게 설명할 수 있다. 감사히도, 이 정의로 바라본다면 나는 실패자가 아니다.
먼저 출간한 에세이 만화에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레즈비언의 소소하면서도 치열한 일상을 기록했다면, 이번에는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서의 시간을 따라가 보려 한다. 존재의 투명함에서 시작해 노동의 투명함으로까지 이어지는, 이중의 투명함을 버텨온 이야기다.
번역가라는 직업도, 레즈비언이라는 존재도 좀처럼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나는 늘 투명 인간처럼 사랑하고 노동하며,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감정과 책임을 감내해 왔다.
이곳에서는 번역을 하면서 느끼는 소소한 감정들, 번역가라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들과 더불어
내가 과거에 바라왔던 꿈들과,
현재까지도 바라고 있는 꿈들과,
그 꿈들이 좌절되어 가라앉으면서 함께 침전된 희망들과,
우울과,
자격지심과,
눈물과,
원망 아닌 원망과,
이토록 부정적인 말들이 숱하게 나열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도전해 보는 이상한 끈질김-집착이라고 해도 괜찮을-에 대한 글들이 주를 이룰 것 같다.
이 지난한 글들을 써보자고 결심한 이유는, 몇 년 동안 마음속에 묵혀왔던 이런저런 응어리들과 잡념들을 정리하고 내 나름의 방법을 이용해 긍정적으로 소화해 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부디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 넘겨, 건강한 똥이 되기를 바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책에는 눈부신 성취담이나 훈장 같은 이야기 따위 담겨있지 않다. 그보다는 묵묵히 번역하고, 거절당하고, 또 번역하면서도 여전히 살아남고자 그리고 살아가고자 애쓰는 과정을 담았다.
일로도 인간으로서도 조금 더 선명해지고 싶어 책상 앞에 앉아 한 줄 한 줄 글을 옮기고 또 한 줄 한 줄 나의 글을 써 내려가는 날들의 기록.
나는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삶 그 자체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특히 소속 없이 일하고, 존재를 쉽게 말할 수 없으며, 말해도 곧장 잊히는 이들—성소수자, 프리랜서, 비정규 노동자 등—에게 이 글로 말미암아 작은 공감과 연대의 손길이 닿기를 바란다.
그리고 좌절과 웃음, 희망과 체념이 뒤섞인 글들이 모여 언젠가 나와 같은 길을 걷는 누군가의 곁에 작은 불빛으로 놓이기를 희망하며 이만 프롤로그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