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 어렸던 초등학생 시절, 우리 모두를 하나로 뭉쳤던 인기 온라인 게임이 있다. 바로 넥슨사의 메이플 스토리다. 누군가 이 글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든다면 우리는 함께 메이플 월드 어딘가에서 열심히 노가다를 하던 동년배일 것이다.
나는 당시 인기가 많았던 마법사를 키웠고, 1차 전직 조건인 레벨 8을 거쳐, 체력이 약한 마법사의 특성상 이 악 물고 더럽고 구질구질하게 물약 구걸을 해가며 열심히 사냥과 퀘스트를 해 2차 전직을 하는 레벨 30이 되었다. 검은 구슬 30개를 간신히 모아 마법사 마을 엘리니아로 돌아가자, 수장 하인즈는 말했다.
“자네는 이제 3개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네…….
불과 독을 다루는 위자드와 얼음과 번개를 다루는 위자드, 신을 섬기는 클레릭 중 하나를 선택하게나…….”
회사를 그만두고 번역 아카데미를 알아보던 그 무렵, 문득 썬콜이냐 클레릭이냐를 고민하던 초등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피카츄 돈까스를 먹으며 둘 중 무엇을 클릭할지 세상 진지하게 고르던 아이는 어느새 훌쩍 성장해 이제는 ‘영상번역 과정’과 ‘출판번역 과정’ 중 무엇을 클릭할지 머리를 싸매게 되었다.
책과 인터넷, 여러 자료를 찾아보며 무엇이 내게 더 맞을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처음에는 영상번역 과정에 관심이 갔다.
적성에 맞지 않아 짧게 배우고 그만두기는 했지만, 나는 동양화를 배우기 전에 애니메이션 입시 미술을 한 적도 있었고, 친구들은 다 아는 중증 만화 오타쿠이기도 하다. 영상번역을 하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드라마를 보며 훨씬 더 재미있게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우선 영상번역은 타임코드, 인점, 아웃점을 맞추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타임코드(Time Code)는 영상의 시간을 표시하는 부호인데, 이 작업을 보고 흔히 TC를 찍는다고 표현한다. 음성과 자막이 뜨는 시간을 맞추는 것이다. 간혹 영상을 보다가 말과 자막이 맞지 않게 뜨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는 타임 코드가 맞지 않은 것이라 보면 된다.
인점과 아웃점도 중요한데, 인점은 자막이 들어가는 순간을 말하고 아웃점은 자막이 사라지는 순간을 말한다. 너무 빨리 뜨거나 너무 빨리 사라지지 않게 잘 맞추어야 한다.
자막의 위치를 화면 속 인물이나 시선 흐름에 방해되지 않도록 적절히 조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자막이 길어 두 줄이 될 경우, 화면의 무게 중심에 맞게 자연스럽게 분할하고 배치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작업은 기계치인 나에게 꽤나 까다롭게 느껴졌다. 특히 특정 프로그램을 다뤄야 한다는 점에서 벽을 느꼈다.
또 한 가지, 내 취미인 애니메이션과 영화 감상이 업무가 되어버리면 쉴 곳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들었다. 맥주 한 잔과 과자 한 봉지를 놓고 아무 생각 없이 쉴 수 있는 그 시간을 업무로 바꿔버리긴 싫었다. 그것만은 내 최후의 지상낙원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출판번역 과정인데…….
출판번역은 문장을 곱씹으며 내 언어로 다시 세공하는 기분이 들고, 무엇보다 그 결과물이 책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책을 쓰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인생의 궤도를 통째로 바꾸어 놓은 ‘최애 작가’가 있었다.
온 세상이 무너지고 온 마음이 누더기가 될 때 몇 번이나 곱씹어 읽으며 위로받았던 그 문장들을 한국어로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지금도 내 컴퓨터에는 그 책의 문장을 야금야금 옮겨놓은 파일들이 남아 있다. 그 이름은 언젠가 출간 목록으로 말해줄 생각이다. 이 최애 작가님의 존재만으로 이미 내 마음은 절반 이상 출판번역 과정으로 기울어 있었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출판번역과 영상번역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은 참고가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위 정보들은 조금만 관심을 갖고 검색해 보면 다 나오는 내용들이기는 하다.
나처럼 번역하고 싶은 작가가 있거나, 감명받은 문장에 오래 머무르며 천천히 음미하는 걸 좋아한다면 출판번역이 더 잘 맞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조심스럽지만 내게는 또 하나의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나는 퀴어 서적 전반에 대한 욕심도 아주 강했다. 소개에도 썼지만 나는 레즈비언이다. 그 당시 일본에는 우리나라보다 다양한 퀴어 관련 서적이 있었고, 그 책들을 ‘모조리’, ‘내가’ 번역해서 내고 싶다는, 얼토당토않지만 원대한 꿈도 있었다. 참고로 ‘모조리’는 실패했지만, 이 꿈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홈 프로텍터로 지내던 시절엔 아주 짧게나마 활동가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렇지만 나한테 그런 올곧게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은 열정은 없었기에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다.
대신, 김은숙 작가님의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김희성 캐릭터처럼 직접 총을 들고 싸우지는 못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글과 그림의 기록—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때로는 그것이 누군가에겐 숨 쉴 구멍이 되고, 증거가 되고,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세상에 조용히 이로운 영향을 끼치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싸우고 싶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세상에 어떤 말을 보태는 방식으로.
그래서 나는 출판번역 과정을 선택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작은 힘이지만 보태보자는, 조용하고 작지만 칼보다 강한 펜을 든 운동인 셈이다.
아직도 출판사에 메일을 보낼 때면 나의 관심사와 내가 출간한 책의 제목을 숨김없이 밝히고 있다. 나는 나의 존재가 부끄럽지 않다.
쓰다 보니 너무 비장한 각오와 무거운 다짐이 계기로 보이는 듯해 보여 조금 민망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로 돈과 행복을 모두 잡고 싶은 인간의 흔하고도 평범한 욕심이었을 뿐!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일도, 사랑도, 돈도 다 잡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앗!!!
그런데 생각도 못한 복병이 있었다. 바로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만이 출판번역 과정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는 꽤 당황했다. 뭐든 배우고 싶으면 신청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시험이라니?!
시험 내용을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때 처음으로 출판번역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맛본 듯한 기분이 든다. 생전 처음 보는 표현들과 난생처음 마주하는 배경 정보들이 가득했다. 아무렇게나 넘길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조사하고, 또 확인하고, 고치고, 다시 쓰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사활을 걸고 제출한 결과, 무사히 시험에 합격했다.
합격했으니 이제 공부할 일만 남았지만, 홀가분한 마음만 드는 것은 아니었다. 회사를 관두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니 부모님 생각이 났다. 다 큰 딸이 또다시 무언가를 배우겠다며 일을 벌이는 모습이 한심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죄송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돈 드는 인풋만 가득하고 아웃풋은 하나도 없는 가성비 떨어지는 딸내미라니!
그렇지만 나는 부모복이 참 많은 딸내미이기도 했다. 전 직장을 다니며 시름시름 죽어가던 모습을 봐서인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한번 해보라던 부모님의 말씀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신나지는 못해도 짜증 나는 일은 안 해야지. 짧은 인생인데.
우리 딸은 뭐든 열정적으로 하잖아. 그냥 해봐.”
의욕과 계절이 함께 한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무렵,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낸 후 나는 아카데미에 다닐 준비를 끝마쳤다.
아, 그래서 메이플스토리 2차 전직은 뭘로 했냐고?
사랑과 봉사의 아이콘인 테레사 수녀 같은, 파티원들의 피(체력)을 채워주는 클레릭을 선택했고 몇 달 후 학원 수업이 많아진 뒤로는 그대로 메이플 스토리를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