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형 여자의 허곡하영 ㅣ 제주도 이젠 가을로 접어든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도 계절이 있다?
본격적으로 7월 1일에 제주로 이사를 하고 난 뒤 가장 적응이 힘든 게 제주의 날씨였다. 한반도 전체가 불볕더위로 '올해가 가장 덥다'를 해마다 갱신이라지만 제주 여름의 뜨거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정수리로 작렬하는 태양이 바늘처럼 내려 꽂히는 느낌이랄까.
처음엔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엄연한 과학이 존재하고 있었다. 제주와 서울은 위도 차이 때문에 태양의 위치가 달라, 같은 35도라도 체감하는 뜨거움이 다르다는 것. 여름휴가로 며칠 제주에서 보내는 것과 정수리가 타들어가는 것 같은 뜨거움을 두 달 내내 견뎌야 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지중해에서도 뜨겁기로 유명한 '몰타'에서도 살아봤지만 제주의 날씨가 지중해와 비슷할 줄 살아보기 전에는 몰랐다.
그 뜨거운 여름을 견디게 한 건 파란 하늘, 하얀 뭉게구름, 도시에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터콰이즈 바다색이었다. 매번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드는 제주 바다는 그야말로 무더위를 한순간에 모두 잊게 만들었다. 여름을 좋아하고 물놀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제주 한 달 살기는 무조건 여름이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여름 내내 제주바다 곳곳을 누볐을 것이라 생각할 텐데 두 달 동안 가본 곳이라곤 위에서 언급한 곳이 전부다. 다들 입도하고 나면 한 두 달은 제주 곳곳을 미친 듯이 돌아다닌다고 하던데 나는 그러질 못했다. 이유는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고 그럼에도 내 다리와 팔과 얼굴은 완전히 익어 버렸고 반바지 자국은 여름의 흔적을 강하게 남겼다. 제주 바다와 만난 건 고작 4번. 휴가철 내내 바다에 보낸 사람처럼 태닝이 돼버려서 살짝 억울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더운 건 너무 힘들었지만 제주 입도 첫 해. 제주 여름, 제주 바다, 제주 구름은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9월이 됐다. 제주만 여전히 덥다. 제주는 관측이래 '여름이 가장 긴 해'로 기록될 예정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기온이 30도 이하로 벌써 떨어졌는데 제주는 혼자 폭염주의보다. 다행이라면 낮에는 정수리로, 등 뒤로, 종아리로
여전히 바늘로 찌르는 듯한 태양이 계속 인사중이지만 저녁이면 더위는 허물허물해졌다.
올해 제주 여름은 '비가 안 오는 해'로도 기록을 세웠다. 여름 내내 그 무시무시하다는 태풍이 한 번도 없었고 딱히 장마라고 할 것도 없었다. 제주 사람들이 다들 '올해는 정말 이상한 여름'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래도 한 번씩 비가 내리기는 했지만 내가 사는 제주시는 스콜처럼 퍼붓는 것도 잠시, 이내 그치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활짝 열어둔 창문을 닫아야겠지만 희한하게도 밖에는 비가 퍼붓는데 집안으로 비는 한방울도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건물 설계가 그런 줄 알고 비가 오든가 말든가 양쪽 방의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다녔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사달이 났다. 9월 둘째 주가 되면서 제주도 비가 오락가락하며 변덕을 부렸다. 해가 나는데 비가 오고 비가 오는데 해가 나고 이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지기를 반복하는 정말 희한한 날씨였다. 여느 때처럼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나왔지만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집에 돌아오니 베란다는 그야말로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비바람이 사선도 아니고 집안으로 자로잰듯 가로로 들이치는 광경은 난생처음이었다.
아! 기후 즉,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여름 내내 바깥에서는 그렇게 바람이 불어도 집 안으로는 바람이 하나도 안 들어왔는데 9월이 되면서 저녁에는 집 안으로 간간이 바람이 들어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분명, 서울에서도 계절이 바뀌는 징후들이 있었을 텐데 어렴풋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는구나 정도였 뿐. 제주가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온다는 신호를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보낼 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더위가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었다. 9월이 됐지만 여전히 한낮의 기온은 33도에서 내려올 생각을 않고 있었다. 한낮의 뜨거움은 여전했고 여름 내내 보았던 기분 좋은 뭉게구름도 여름 그대로였다. 그러니 제주만은 아직 여름이었다. '이렇게 비가 안 오는 여름은 처음'이라는 제주 사람들은 이젠 '9월에 이렇게까지 더운 건 처음'이라고 했다.
한 며칠 비가 오락가락하다가 9월 18일. 그러니까 며칠 전. 기온이 갑자기 30도 아래로 뚝 떨어졌다. 일기장에 30도로 떨어진 날이라고 적어놨을 정도로 신기했다. 너무나 상쾌한 아침이라 오랜만에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어느새 상사화가 고개를 쑥 내밀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달라진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어제와 오늘이 칼로 무 자르듯 계절이 바뀌는 시점을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느낀 적이 있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기억나지 않는다. 제주 이주 첫 해라서 내가 더 계절감각을 선명하게 느끼는 것은 아닌가 싶긴 했다.
하지만, 확실히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여름과 가을사이, 그러니까 '간절기'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계절이 제주에서는 그저 '간절기'로 부르기엔 뭔가 차이가 있다. 단순히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하고 낮에는 그래도 덥다'거나 '여름은 아닌데 가을이라고 하기엔 이르다'라고 설명하기엔 뭔가 2%가 부족하다. 다만, 그 '뭔가'를 본능적으로 알기는 하겠는데 그게 무엇인지 아직은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겠다. 제주에서 4계절을 살아보고 나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으려나.
누군가 제주는 계절과 계절사이에도 계절이 있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니라 12 계절이라고 했을 때 너무 오버한다고 생각을 했었더랬다. 그랬는데 그게, 그러니까 정확히 9월 18일에 알게 됐다 이 말이다.
계절과 계절 사이,
오직 제주만이 가진 계절이 무엇인지 열심히 찾아볼 요량이다.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면 그걸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글 차례는 제주 이사하는 것부터 써 내갈 생각이었는데 날씨 이슈가 있다 보니 날씨 얘기로 먼저 시작을 하게 되네요. 이게 다 'P형 스타일'이니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적어 내려가겠습니다.
제주 관련 영상(주로 쇼츠)은 개인 유튜브 채널(https://www.youtube.com/@letsgoheretv)에서 실시간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