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전시 : 펜으로 잇는 제주4.3 기억 ‘길 위에 4.3드로잉’
제주 4.3을 그림에 담다.
지난 9월 제주로 먼저 이사를 온 지인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너 그림 그리고 싶다고 했지? 펜드로잉 참자가를 모집하는데 한 번 해봐."
정확히 어떤 작업인지도 모른 채,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일단 접수부터 했다. 그림, 정확하게 어반스케치는 서울에 있을 때도 배우다 말다하면서 수 년간 시간을 흘려보냈고, 제주에서도 취미 하나쯤은 있어야 했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첫 번째 수업 시간에서야 알았다.
막연했던 펜드로잉은 <길위의 4.3 '삼도리 4.3 이야기'>, 제주 4.3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는 작업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한 첫 날, 제주 다크투어와 함께 진행될 작업 설명을 듣는 동안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제주로 이사 온 뒤 어떤 방식으로든 제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첫 작업이 제주 4.3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반스케치를 그려보기는 했지만 세밀화에 가까운 펜드로잉은 처음이었다. 스케치북도, 펜도 없어 필요한 재료를 모두 새로 준비하는 것부터가 부담이었다. 그래도 도전해보기로 했다.
본격적인 현장 드로잉에 앞서 우리가 그릴 삼도리 골목을 직접 걷는 다크투어가 진행됐고 집결지는 관덕정이었다. 제주로 이사를 온지 두 달 남짓. 아직 구제주, 신제주도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삼도리는 또 어디란 말인가 싶어 의아했다.
삼도리는 지금의 삼도동 옛지명으로 관덕정 일대는 탐라 천년의 역사를 품은 곳이자 관덕정은 4·3 사건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장소였다.
삼도리 골목을 따라 걷는 동안 '제주 최초'라는 기록을 수도 없이 마주쳤다. 시간이 멈춘듯한 골목길은 여행자로 만났던 제주와는 전혀 달랐다. 유서 깊은 구도심이라 생각했던 이곳이 제주 4·3의 비극에서 빠질 수 없는 장소 중 하나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제주 4·3을 꽤 안다고 생각했다. 큰 오산이었다.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골목 안쪽에,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곪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날은 기온이 33도가 넘었고 체감온도는 거의 37도에 가까웠다. 잠깐만 서 있어도 땀이 줄줄줄 흘렀다. 여러 곳에서 실시하고 있는 다크투어 참가자 중 외국인이 의외로 많았다. 한국인은 대부분 중장년층이었고 젊은 세대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방식으로 소비되는 제주에서, 이런 아픈 역사도 가끔은 함꼐 들여다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조차 오늘에서야 이 사실을 알았으니 누굴 탓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림으로 기록해야 할 곳은 총 네 곳 - 제주도립병원 옛터, 박씨 초가 일대, 옥성정 옛터, 관덕정. 첫 현장 드로잉은 제주도립병원 옛터.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어반스케치를 오랫동안 배웠지만 현장에서 제대로 그려본 경험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조차 몰랐다. 잘 해보고 싶다는 마음만 컸지 그림 실력이 따라가지 못하니 과연 이 작업을 내가 끝까지 해낼수 있을지도 의문이 들었다. 결국 펜을 놓고 우선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기초 드로잉책부터 전문 서적까지 총 6권의 책을 주말 내내 책만 들여다봤다.
6주 내내 가능한 모든 에너지를 그림에 쏟았다. 옥성정 옛터를 그리던 날은 다른 일정으로 참여하지 못했고 결국 세 점만 완성해 제출했다. 작품 제목을 짓는 데 그림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썼다. 모든 작업을 마친 뒤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었다.
지난 6주간 모든 에너지를 쏟았던 작업이 끝났다. 제주를 나름은 잘 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손 끝으로 느껴지는 묵직한 슬픔이 너무도 컸다. 아직 미천한 내 그림 실력이 아쉬울 뿐.
엽서 제작만 하는 줄 알았던 작업은 전시가 최종마무리였다. 제주에서 첫 전시가 4·3이라니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작가 노트>를 쓰기까지도 많은 고민을 했다. 최종 작가노트는 이렇게 썼다.
<작가노트>
이 그림을 그리며, 잊혀가는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이들의 고독과 숨결을 담고자 했다.
오랜 침묵 속에서도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의 흔적은 살아 있는 기억의 또 다른 형태다.
묵직한 슬픔을 외면하지 않겠지만,
삶이, 그 무게에 잠기지 않기를 바란다.
영원히 작별할 수 없기에.
Pen Drawing exhibition (group)
It’s a record of the moments I encountered while living on Jeju Island — places I walked past, the traces of people I met, and the quiet emotions that lingered between them.
I wanted to capture the faint yet vivid traces that time leaves behind, and the stories that quietly breathe within them.
작가노트를 쓰고 나니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첫 날 마주했던,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그림을 그리는 내내 나를 붙잡고 있었던 것 같다. 갑작스럽게 눈물이 터졌고 헛헛함이 끝까지 차올랐다. 개인전을 준비할 때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라 더 당황스러웠다.
전시는 제주 소통센터와 순아커피에서 진행됐다. 현재 순아커피에서 12월 말까지 전시가 이어지고 있다. 엽서 제작은 '박씨 초가 일대'로 선택했다. 의외는 많은 사람들이 나무 그림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다.
나무는 제주도립병원 옛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녹보수다. 나무를 세밀하게 그린 것이 처음이라 기둥만 그려놓고 이파리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라 마감 직전까지 손을 대지 못했다. 여러 그림을 참고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그냥 손 가는 대로 그려보자'며 펜을 잡았다. 이상하게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정신없이 4시간이 흘렀고 나무가 완성됐다. 완성된 나무를 보며 생각했다. '아, 나무가 원했던 이파리가 따로 있었구나.'그림을 본 사람들이 나무가 살아 있는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처음 나무를 그려본 나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1회성 이벤트 작업이 이렇게 깊어질 줄은 몰랐다. 내년에도 이 작업이 이어진다면 다시 참여하고 싶다. 아직은 예산문제로 확정이 되지 않았지만 제주를 그림으로 남기는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2026년에는 어떤 제주의 얼굴을 만나게 될까.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제주 소통센터 전시 현장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