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귤'은 인간성 테스트라고요?

제주에서 귤이란 뭘까?

by 여행작가 정해경



"귤 따러 갈래?"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면서 제주 곳곳 귤밭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귤이 익어간다.


제주에 사는 동안 가능하다면 내가 직접 딴 귤을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간혹 '겨울에는 귤 따는데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던데 아르바이트나 할까' 우스갯소리를 했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하루 일하고 병원비가 더 나올 게 뻔한 데다가, 초보를 누가 선뜻 써주겠는가.


지인이 한때 몸을 담았던 공정무역 트립티에서 귤을 딸 손이 부족하다며 '귤 따는 자원봉사'를 가자는 제안을 했다. 11월 초중순쯤 처음 연락이 왔을 때는 허리가 좋지 않아 한 차례 미뤘다. 다행히 요즘은 상태가 많이 나아져서 이번에는 기꺼이 함께하겠다고 했다.


마침 육지에 있는 가족들도 제주 귤이 먹고 싶다고 하던 터라, 내가 직접 딴 귤도 보내줄 겸 흔쾌히 따라나섰다. 제주로 이사 온 뒤 가족들에게 달라진 것 중 하나는 '귤'이다. 예전에는 마트에서 사 먹던 귤이었는데 어느새 산지 직송 귤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


제주 한가운데 한라산이 있어 여름에는 서귀포에, 겨울에는 제주시 쪽이 흐리고 비가 많이 온다고 했는데 역시 그랬다. 제주시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금방 비가 쏟아질 듯 우중충했는데 5.16 도로를 넘어가자마자 바로 바로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트립티가 농사를 짓고 있는 귤밭은 한라산을 뒷산으로 두고 있는 서귀포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노랗게 잘 익은 귤을 보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농약 1도 안 친 유기농 귤을 재배하고 있는 공정무역 트립티


예전에 귤을 따 본 경험이 있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귤을 따기 전에 다시 한번 귤 따는 법을 배웠다. 귤은 꼭지를 가로로, 최대한 바짝 잘라줘야 한다고. 자칫 덜 잘리거나 사선으로 잘릴 경우 배송과정에서 뾰족한 꼭지가 다른 귤에 상처를 내고, 그 상처로 인해 귤이 터지거나 빨리 썩어 클레임이 들어온다고 했다.

귤을 딸 때 바짝 잘라줘야 귤을 박스에 담았을 때 다른 귤이 상처가 나지 않는다.


간혹 마트에서 산 귤이 유난히 빨리 상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무리 자원봉사라지만 피해를 줄 수는 없기에 알려준 대로 최대한 신경 써서 귤을 땄다. 처음에는 조심스럽던 손길도 점점 익숙해졌고, 어느새 내가 딴 귤이 수북히 쌓여갔다.

귤 따기 시작

AI가 생각보다 빠르게 인간을 대체하고 있는 요즘, 귤 따는 일도 언젠가는 로봇이 하게될까? 같은 쓸데없고도 진지한 이야기들이 귤을 따는 내내 오갔다. 혼자였다면 중노동이었을 테지만 여럿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작업을 하니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고 시간도 금세 흘렀다.


늘 궁금했던 '어떤 귤이 맛있는 귤인지'를 대표님께 물었더니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새가 쪼아먹은 나무의 귤은 무조건 맛있다'고 하셨다. 새들의 본능적인 감각은 맛있는 귤을 귀신같이 찾아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새가 쪼은 귤은 껍질이 말랑말랑했고 먹어보지 않아도 향 자체가 달랐다.


또, 껍질이 거무튀튀한 귤일수록 당도가 높은 경우가 많다고했다. 반나절 귤밭에 있으니 대중 '아, 이건 맛있겠다'싶은 감이 생겼다. 맛있는 귤 사이에서 더 맛있는 귤을 찾아내는 미묘한 방법을 터특했다고나 할까. 사실, 트립티 귤은 농약을 치지 않은 데다가 자연에 가깝게 키운 귤이라 확실히 맛이 깊었다.

새가 쪼아먹은 귤은 묻고 따질 필요 없이 가장 맛있는 귤이다.


대략 4시간 남짓, 우리가 딴 귤이 수북이 쌓였다. 이렇게 수확한 귤은 세척이나 별도의 후처리 없이 현장에서 바로 선별해 5kg, 10kg 박스에 담아 주문자에게 발송된다. 나도 현장에서 직접 따고 담당자들이 직접 고른 귤을 5kg 택배로 육지 가족들에게 보냈다. 귤 수확철에는 오늘 보낸 택배가 독도를 제외하고는 무조건 다음 날 도착한다는 말에 꽤 놀랐다. 제주 택배는 늘 느리다는 인식과 달리, 귤만큼은 예외였다. 그만큼 제주에서 귤이 차지하는 비중을 실감했다.


내가 귤을 따던 날은 서울에는 첫눈이 내렸고, 가족 단톡방은 온통 첫눈 이야기로 들썩였다. 그런데 내가 직접 딴 귤 사진을 올리자 첫눈 이야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귤나라가 서울의 첫눈을 이길 줄이야. 5kg 한 박스에 28,500원, 가격은 다소 있지만 귤을 받아본 가족들은 “이렇게 맛있는 귤은 처음”이라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귤을 먹어본 가족들이 귤이 맛있다며 재주문과 선물을 위해 다시 주문하고 그 귤을 받은 사람들이 또 주문하고... 그렇게 그렇게 주문이 주문을 부르고, 입소문이 입소문을 타며 트립티 귤은 여기저기 퍼져나갔다. 트립티는 귤 판매 수익으로 농가를 돕고, 소외된 청소년들을 후원하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아주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내가 직접 수확한 귤
기계 선별이 아닌 사람 손으로 직접 선별하다 보니 각각 전부 다른 크기의 귤이 담긴다.


파찌 귤

작업이 끝난 뒤에는 ‘파찌 귤’을 가져가라며 제주산 삼나무로 만든 궤짝에 귤을 한가득 담아주셨다. ‘파찌’란 상품성이 떨어지는 귤, 흔히 말해 못난이 귤이다. 모양이 덜 예쁠 뿐이지 맛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판매가 되지 않기에 처리하는 것도 농가의 일이라고 했다. 귤을 담는 노란 박스를 ‘컨테이너’라고 부르는데, 하나 가득 채우면 약 20kg 정도 된다고 한다.


파찌 귤 한 컨테이너, 두 컨테이너 샀다는 말을 종종 듣기는 했는데 이날 비로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게 됐다. 상품성이 떨어지기에 가격은 훨씬 저렴하고 맛은 차이가 없기에 일부러 파찌 귤을 사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오일장이나 당근 앱에도 파찌 귤 판매가 종종 올라오기도 한다.


귤 좀 보내줘~

귤 철이 되니 제주 커뮤니티에는 귤 이야기가 부쩍 늘어났다. 그중 가장 많이 보이는 하소연은, 육지 사람들이 제주에 사는 지인에게 귤을 당연하게 보내달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못 보내겠다고 하면 서운해하는 반응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글도 심심찮게 보인다.


막상 제주에 살아보니, 귤을 보내는 일은 생각보다 큰 수고였다. 상품 귤은 5kg 기준 택배비 포함 2만 5천 원 안팎이고, 여러 명에게 보내야 할 경우 금액 부담은 금세 커진다. 파찌 귤을 보내려 해도 일부러 시간을 내 사러 가야하고 귤을 보낼 전용박스는 또 따로 구매해야 한다. 따라서 박스 구매, 포장, 택배비까지 더하면 마트에서 귤을 사 먹는 비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제주 커뮤니티에 “제발 귤 보내달라는 말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글이 올라오는 것도 이해가 된다. 제주 사람들이 먼저 보내겠다고 나설 때라면 모를까, 그 수고로움을 조금만 헤아려줬으면 하는 마음일 것이다.

관덕정 옆 제주 우체국에는 겨울철 귤 전용 박스(10kg)를 판매하고 있다.
우체국마다 귤을 보내는 손길로 분주하다.

귤도 못 얻어먹는...

실제로 제주에서는 ‘돈 주고 귤을 사 먹는 사람은 인간성이 안 좋다’는 농담 섞인 말을 자주 듣는다. 평소 인간관계를 어떻게 하길래 귤 하나 얻어먹지 못하느냐는 뜻이다. 왜 하필 귤이 인간성의 척도가 되었을까.


제주 토박이들에게 물어보면, 크고 작게나마 귤밭을 가진 집이 많다. 직접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친척이나 이웃, 지인 중 누군가는 귤 농사를 짓고 있다. 그러니 제주에서 귤은 너무 흔하고, 너무 많아서, 특히 버려질 수도 있는 파찌 귤을 나누지 않는 편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된다.


그래서 제주에서 귤 인심은 육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넉넉하다. 겨울에 제주를 여행하다 보면 식당이나 숙소에 귤이 바구니째 놓여 있고, 자유롭게 먹으라는 풍경도 흔하다. 제주에서 귤은 필요해서 사는 물건이기보다는, 관계 속에 연결되어 있다는 하나의 징표에 가깝다. 어쩌면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이 혈연과 지연, 혼맥으로 사람들을 촘촘히 엮어온 것처럼, 귤 또한 관계의 온도를 재는 지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귤 농가가 줄고, 이주민이 늘어난 지금은 예전과 같지 않다고들 하지만, 제주 토박이들 사이에서는 이 말이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제주 6개월 차인 나는 귤을 얻어먹었을까, 못 얻어먹었을까.

“제주에서는 귤 사 먹는 거 아니야.” 가족이 유기농으로 지은 귤이라며 같이 그림 그리는 언니가 쇼핑백 가득 귤을 담아주셨다. 손톱 밑이 노래질 때까지 귤을 까먹으며, 나도 이 귤 인심에 무엇으로 보답할지 고민하고 있다.


제주 6개월차, 이제서야 나도 조금씩제주에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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