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제주, 동백의 계절

꽃이 지는 것도 한 계절이다.

by 여행작가 정해경



겨울 제주를 대표하는 것을 꼽으라면 눈 내린 한라산과 동백이지 싶다.

겨우 내내 한라산에 차곡차곡 눈이 쌓이고 있어 '한라산이나 한번 가볼까'싶어 한라산 예약 사이트를 접속했다가 깜짝 놀랐다. 예매할 수 있는 최대치의 날짜까지 전부 매진. 겨울 한라산의 인기를 비로소 실감했다고나 할까.


한라산 눈꽃을 못 본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제주 동백은 언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작년에 제주 더위가 10월까지 이어지면서 조금씩의 차이는 있어도 대체로 1월 중순부터 절정을 맞이했고 약간 시들긴 해도 계속 피고 지는 동백꽃의 특성상 1월 말인 현재까지도 아름다운 동백꽃을 볼 수 있다. 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육지의 매서울 겨울을 생각하면 한 겨울에 피어나는 제주의 붉은 동백은 그래서 더 눈길이 간다.


그러고 보니 제주에는 동백이 유난히 많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왜 제주에는 동백꽃이 많은 걸까?

동백나무는 따뜻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데 영하로 잘 내려가지 않는 제주 기후의 특성상 동백나무가 자생하기에 좋은 환경이다. 그 덕분에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수백 년 된 동백나무 군락지들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이처럼 한겨울 피어나는 붉은 동백은 제주 사람들에게 단순히 예쁜 곳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도구였다. 동백나무는 잎이 두껍고 사계절 내내 푸르기 때문에 바람이 강한 제주에서 밭이나 집 주변에 심어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으로 사용했다. 또한 동백 열매에서 짠 기름은 식용으로도, 머리에 바르는 기름으로도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동백나무 자체가 단단해서 가구를 만드는데도 요긴하게 쓰였다고 하니 척박한 제주에서 이만한 효자목이 또 있을까 싶다.


제주에 동백으로 유명한 지역을 들자면 단연코 서귀포 남원읍 일대다. 남원읍은 동백꽃 토종 군락지와 애기 동백 수목원이 있는 위미지역과 마을 길 전체가 토종 동백나무인 신흥리와 휴애리로 대표되는 신례리가 있어 겨울철 제주 여행 필수코스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위미지역 동백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위미 동백나무 군락'이라고 지도에도 나오는 이곳은 한 여성의 집념 어린 역사가 스며들어 있다. 약 150여 년을 거슬러 위미리로 시집을 온 현맹춘 할머니(1858~1933)는 당시 바위투성의 거친 황무지가 바닷가 바로 앞이라 바람이 너무 세서 농사가 안 되자 할머니는 바람을 막기 위해 한라산에서 동백 씨앗을 직접 따다가 심었다. 할머니가 평생 동안 가꾼 이 방풍림은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9호인 ‘위미 동백나무 군락’이 되었고, 지금의 위미리 동백숲 벨트의 시작이다.


이렇게 할머니의 정성이 알려지면서 위미리는 제주에서 '동백'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동네가 되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근처 대규모 농장이나 수목원을 조성하려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위미리로 모여들었고 기존에 나무를 키워 팔던 농장주들도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애기동백을 대량으로 심으면서 위미는 겨울철 동백명소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이다.


다만 할머니가 심었던 동백은 제주 고유의 토종동백이고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의 동백은 애기 동백이다. 애기 동백이 먼저 피어난 뒤 질 때 즈음에 토종동백이 피어나니 12월부터 3월까지 위미에서는 내내 동백꽃을 볼 수 있다. 위미 동백나무 군락은 이제 동백이 피기 시작을 해서 가보지 못했고 제주 서귀포 일대 애기동백 명소를 그중 몇 군데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동백수목원


▶ 볼고롱 동백



▶ 위미리 3760


▶ 가시림



▶ 삼달리 꽃밭에서



제주에서 살다 보니 동백이 새롭게 보인다. 동백은 담장 옆에도 있고 밭에도 있고 집 뒤 그늘에도 있고 길가에도 있을 만큼 흔해빠졌다. 동백은 제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할 때부터 같이 살아온 나무고 필요했기 때문에 베지 않아서 남았다고나 할까. 제주 사람들에게 동백은 '구경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냥 '생활'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제주에서 동백꽃은 지고 땅바닥에 굴러 다녀도 쓸고 치우지 않는다. 육지라면 떨어진 꽃은 '끝난 장면'이기 때문에 바로 청소의 대상이지만 제주는 길 위에, 흙 위에, 돌담 아래에 그냥 둔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사람이 그냥 밟고 다닌다. 마치 동백꽃이 지는 장면마저도 삶의 일부라고 남겨두듯. 꽃이 지는 것도 한 계절에 포함시켜 놓은 제주스러움.



동백은 묘하게 제주와 닮았다. 동백은 드라마틱한 낙화가 아니라 '툭!' 그 한 번으로 피는 일과 지는 일이 같은 무게를 가진다. 피어 있을 때는 말이 없고 질 때도 소란을 만들지 않는다. 그냥 '여기까지가 내 몫이다'라고 말하듯 툭! 물러난다. 꽃이 필 때는 어디서든 예쁘다. 하지만 제주 동백은 어떻게 피느냐보다 어떻게 물러나느냐를 봐야 하는 꽃이란 걸 제주에 와보니 알겠다. 질 때 더 제주다운 동백꽃. 지는 것도 한 계절이고 그걸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결국 끝은 새로운 시작임을. 겨울, 제주 동백꽃이 나를 가르친다.



덧. 제주에서 동백은 단순한 동백이 아니다. 동백꽃은 꽃송이가 시들지 않은 채 통째로 뚝뚝 떨어진다. 오죽하면 송창식의 노래 '선운사'에서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이라고 했을까. 동백꽃이 처연하게 지는 모습이 제주 4·3 사건 당시 소리 없이 쓰러져간 희생자들의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동백꽃이 그분들을 추모하는 상징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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