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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해경 Apr 16. 2019

영화 러브리스(LOVELESS),  사랑 없는 세상

사랑이 뭘까?  

브런치 무비패스 #1 러브리스(LOVELESS)

브런치 무비패스 첫 번째 영화로 보게 된 러브리스. 개인적으로 영화를 선택할 때 오로지 영화 제목과 포스터만을 보고 영화를 결정하는 탓에 러시아 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안드레이 즈비아진세프 감독의 영화라는 것도 현장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특히 러브리스는 22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으로 제70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 제90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라는 뒤늦은 정보를 확인하고 총총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영화의 첫 장면, 어떤 건물에 러시아 국기가 펄럭인다.

 '아! 러시아 영화구나!' 그리고 이내 스크린 속으로 들어간다. 정지된 화면처럼 느껴질 정도로 적막감만 맴도는 회색빛 공장형 건물. 아이들이 나오지 않았다면 학교라곤 생각도 못했을 것 같다. 마치 흑백처럼 느껴지는 화면에 롱테이크로 학교에서 나와 숲으로 걸어가는 알로샤의 뒷모습만 열심히 쫓는다. 아이는 혼자다. 그렇게 한참을 알로샤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며 아이의 시선을 따라간다. 알리샤가 주인공인 영화인가 싶을 즈음 시선은 엄마인 제냐로 옮겨간다. 그렇게 아이인 알리샤와 엄마인 제냐, 엄마인 제냐의 삶, 제냐와 아버지인 보리스, 아버지인 보리스의 삶, 엄마인 제냐와 외할머니,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아이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로 옮겨간다.


부부지만 사실상 이 부부와 각자 불륜을 맺고 있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카메라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 누구 하나 놓치지 않고 모두 훑는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직, 간접으로 모두 관계를 맺고 있다. 부부로, 부모로, 자식으로, 연인으로 묶여 있어  '사랑'하는 사이지만 그들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사랑은 1도 없다. 영화에는 분명 주연, 조연이 있기 마련인데 러닝타임 내내 등장인물 모두를 같은 비중으로 바라보게 한다. 흔히 말하는 연기 구멍도 없다. 심지어 첫 장면에 짧게 등장하는 알리샤는 씬스틸러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강렬하다. 아이의 가출로 시작한 이야기는 모든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하나하나 까발리지만 특별한 큰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극적이지도 않은데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영화가 끝나고 러닝타임 127분에 깜짝 놀랐을 정도로 흠뻑 빠진 영화, 러브리스였다.




아이는 사라졌다.

이혼을 앞두고 있는 부모가  서로의 탓으로 돌리는 상황을 알게 되면서 알리샤는 가출을 하게 된다. 가출을 한 알리샤를 찾는 과정이 영화 러브리스의 전부다. 영화 내내 가출한 아이를 찾는 과정이 통상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건 영화의 장치일 뿐 결국 초점은 가족이란 이름하에 있지만 사랑이라곤 전혀 없는 해체된 가족의 적나라한 모습을 통해 한 사람이, 한 가족이, 더 나아가 이 사회가 '사랑 없이 ' 얼마나 황폐할 수 있는지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녀 제냐.

보리스를 한 순간 사랑한다고 믿었고 아이가 생겨 결혼을 결심한 제냐. 그러나 제냐는 사랑 따윈 받아본 적 없는 엄마를 떠나기 위한 수단으로 이 결혼이 좋은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니 자신이 낳은 알리스지만 뱃속부터 달가울 리 없었고 자신의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라고 여긴다. 삶이 충만 할리 없는 그녀가 집착하는 건 스마트폰이다. 매 순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스마트폰에 집착하는 제냐는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회상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사랑 없는 삶을 탈출하기 위해 모든 것을 갖춘 안톤에게 끊임없이 사랑하냐고 강박처럼 되뇌며 묻는다.


그 남자 보리스. 

가정이 있는 보리스에게는 부인인 제냐외에도 만삭의 여자, 마샤가 있다. 그런 보리스의 직장은 이혼하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청교도적 윤리의식이 강조되는 곳이다. 이혼하고 난 뒤 회사가 잘릴 걸 걱정하면서도 마샤와의 관계는 지속된다. 아이가 없어지고 난 뒤 보리스가 보이는 행동은 여느 아빠와 다른다. 오직 자신만 생각하는  보리스는 제냐와 이혼 후 마샤와 결혼했지만  마샤가 나은 자신의 또 다른 아이도 알리샤를  대했을 때와 결국 똑같다.


사랑이 뭘까?

일반적인 관계만 놓고 보자면 제냐와 보리스의 관계는 극단적일 수도 있고 어쩌면 누군가는 제냐와 보리스와 같은 상황일 수도 있다. 사회 구성원인 이상 누구나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관계가 잘못됐을 때 내 탓을 하기보다 남 탓을 하기 마련이고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나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허나, 내가 변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사람이 바뀐다고 한 들 계속 같은  상황만 반복될 뿐이다. 결국 아이는 사라졌고 제냐와 보리스는 이혼을 하고 각자의 연인들과 새로운 삶을 꾸리지만 각자의 파트너만 바뀌었을 뿐 모든 것은 처음과 똑같다.  내 안에 비롯된 '사랑 없음'은  그 무엇으로도, 누구로도 바뀌지 않는다. 나에서 출발한 '사랑 없음'의 러브리스는  한 가정이 해체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결국 그 문제는 비단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걸 말한다.


알리샤, 알리샤와 제냐
엄마 제냐, 아버지 보리스




오늘의 러시아.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 한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영화 러브리스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상하리만치 각 등장인물들과 객관적인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영화 속 계절이 바뀌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계절감의 변화를 느낄 수 없는 러시아의 스산한 날씨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사랑이 없는 등장인물들의 관계도 관계였지만 이 영화를 보내는 내내 잘 알지 못하는 러시아가 궁금해졌다.



감독이 묻는다

아이가 실종돼도 국가적인 시스템도 갖춰져 있지 않고 경찰은 의지가 없다. 그런 경찰을 대신하는 건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사회단체다. 오히려 경찰보다 이들이 더 열정적으로 아이를 찾고자 하지만 이들 단체에도 연민이나 사랑 따위의 감정은 없다. 학교는 어떨까? 학교 선생님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을 딱 거기까지 이행할 뿐 사라진 아이에게 여전히 연민이나 사랑 따위의 감정은 철저히 배제된 채 정시에 퇴근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영화 내내 등장하는 우크라이나 내전이나 부패가 가득한 푸틴 정부의 모습을 TV 화면 속에 비춘다. 결국 아이는 찾지 못했고 제냐는 안톤과 새 생활을 시작했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제냐는 가슴에 러시아가 새겨진 체육복을 입고 러닝머신에 올라 달리다가 멈춘다. 마치 이게, 러브리스가 지금의 러시아라고 말하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알로샤가 자신의 집 창밖으로 쓸쓸히 바라보던 풍경은 눈 내리는 겨울이 되자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나와 눈썰매를 타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풍경으로 바뀌었다. 마치 '사랑이 무엇인가?'라고 감독이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이 없어 사라진 아이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결국 '사랑'이 아니었을까. 사랑 없음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아이러니.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사라진 아이 알로샤는 어떤 아이로 자랐을까 궁금해졌다. 사랑은 개인적인 차원으로 느껴지지만 단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문득 개인이 조금 모자라고 부족해도 사회 공동체가 품어 아이를 키워냈던 것이 우리에게도 까마득한 옛날이 된 지금이 씁쓸해지는 건 왜일까?


영화 러브리스 개봉일 : 2019.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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