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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신물러 Dec 11. 2019

프랑스 할머니의 흔적

남편 할머니네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전지적 외국인새댁 시점 이야기

빈티지 콜렉터가 된 미니멀리즘 신봉자


그렇습니다. 저희는 남편의 친할머니 댁에서 신혼살림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할머니댁에 몸만 들어가 살게 된 셈이죠.


할머님은 얼굴을 직접 뵌 적도 없습니다.

남편을 만나기 1년 전,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셨거든요.

당시 오래 사귀던 여친과 헤어져 갈 곳을 잃은(?) 남편이 이 집을 떠안으면서 여차저자하게 된 거죠.


할머니가 스크랩하신 당시 아파트 사진. 1960년대엔 고오급 신축이었겠지만, 지금은 할렘 분위기가 물씬


그렇지만 이 집에서 할머님의 존재감은 아직도 큽니다.

저희 집의 문패부터 부엌살림이며 가전이며 가구며 심지어 문구용품까지 

수많은 살림살이를 할머님이 쓰시던 그대로 쓰고 있거든요.


대장부같은 포스에 노래와 춤을 좋아하시던 흥부자,
놀러가면 늘 먹을게 넘쳐나던 손 크고 솜씨 좋은 할머니,
나는 아직도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그 뿐만이 아니에요.

모두가 '마마 레오' (성함이 Elenore셔서)라고 불렀던 그 분, 존재감이 보통이 아니셨던 모양입니다.

경비아저씨도 이웃들도 'Lopez 부부'라고 하면 '아이고 마마레오 손녀며느리야?'하며 함박미소를 쏴주시고, 

명절에 옛이야기가 나오면 남편의 외가 가족들까지도 모두 할머니가 그립다고 애틋하게 말합니다. 


할머니가 쓰시던 10살 오븐, 20년은 돼보이는 노란 비니루 커버 수첩
새로 칠해서 쓰는 할머님의 장식장, 타일 사이사이 꼬질해도 버릴 수 없는 협탁


지름신을 마음껏 신봉해도 용서가 된다는 신혼이라지만, 

한 가족의 역사와 추억이 그득그득한 물건들을 버릴 수가 있어야죠.

그리하여 아마존 위시리스트는 내려놓고, 

냉장고부터 오븐, 컵, 그릇, 쟁반, 조리도구까지 싹 접수 완료!


전 외려 미니멀리스트에 가깝고, 

뭣보다 절대 청승을 떠는 성격은 아닌데 말입니다...

저보다 많은 세월을 이 집에서 살아왔을 것들을 쓰레기통에 버릴 깡이 안 생기더라고요.

남편이 처분하려고 모아뒀던 것까지도 주섬주섬 다시 주워와서,

다시 닦고 칠하고 조이고 해서 이제 그것들은 새 자리에서 쓰임새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할머니의 무거운 삶, 그리고 귀여운 취향


이렇게 살다보면 같이 산 적이 없더라도 할머니의 속사정을 누구보다 긴밀히 알게 됩니다.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피식피식 나오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노후 사진!


할아버지와 두 분이 살던 집에서 나온 30인용 그릇과 커트러리 세트,

최소 10인분 이상 용도의 냄비와 오븐용기,

찬장 가득한 스페인 향신료와 빠에야 양념들,

장식장마다 그득그득 들어있던 수제 라디오 녹음테이프, 플라멩고 테이프,

레오 아버지의 꼬꼬마시절부터 할아버님의 꽃미남 시절까지 다 들어있는 사진 앨범들,

손님오는 날을 대비해 안쓰고 모아두셨을 중국음식점 젓가락들,

10장에 3유로짜리 새해인사 카드, 그림이 예쁜 카드와 주사위, 색연필들 ...


너무 예뻐서 한데 모아둔 할머님 소품
대대손손의 (흑)역사ㅋㅋ가 모두 담긴 앨범들

 

전쟁과 피난통을 강인하고 따뜻하게 살아낸 
프랑스 할머니와 한국 할머니는 참 많이 닮았습니다. 


대부분의 일생을 프랑스에서 보내셨지만

모든 취향과 소품이 말해주듯 할머니는 사실 스페인분이라고 하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어린시절 스페인으로 건너가 결혼해 아이를 낳은 뒤 스페인내전 때 정치공작을 피해 피난을 오셨다고 하네요. 

당시 허허벌판 공업지대였던 이 동네에서 공장노동자로 일하시면서 자식들을 길러내셨고, 

주말마다 가족들에게 스페인음식을 잔뜩잔뜩 해 먹이셨고, 

술을 드시면 스페인 가요를 부르셨고,

감탄사와 욕설은 꼭 스페인어로 하셨다던 ㅋㅋ


남북전쟁을 살아낸 우리 할머니와도 참 많이 닮은 삶이었습니다.




할머니와 나의 연결고리


결혼 전 현관 앞에서 찍은 사진. Lopez 문패를 그대로 이어받아 쓰게 되었네요.



2년도 안되는 짧은 연애 끝에 남편과 결혼해야겠다 마음먹은 건

남편과 그 가족이 천연기념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정말 팔이 늘 안으로 굽는 가족 바보들이에요.


그럼 만만찮은 시월드라는 뜻 아니냐고요?

다행히 아들도 며느리도 굽은 팔 안에선 순위가 없습니다.

마마 레오가 입버릇처럼 하셨다던 말처럼요.

"우리 아들은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남자야.
그러니 우리 아들이 고른 여자? 당연히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여자지."


마마 레오에게 모두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고 예쁘고 똑똑했던 것처럼

남은 가족들도 서로를 아끼는게 느껴집니다. 

나가는 말에서라도 무시하거나 할퀴지 않습니다. 

다들 고슴도치같아요.

이 가족 안에서라면 빡센 외국생활도 외로울 겨를이 없겠구나 싶을 정도로요.


그리고 무엇보다 프랑스어에 서툰 할머니 할아버지를 둔 레오는

제가 마치 인내심 테스트처럼(ㅋㅋ) 말귀를 못 알아들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더라고요.

모국어가 다른 국제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남편만 가진게 함정)


그래서 가끔은 저희 결혼의 배후에 할머님이 있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니, 쓰고 보니 맞는 것 같네요.


코흘리개 시절 남편과 마마 레오


신혼살림이 좀 낡고 촌스러워도
왠지 이 물건들을 쓰다 보면 저도 할머님을 닮아갈 것 같아서요



얼마 전 할머니의 빨간 장미가 박힌 슈퍼빈티지 그릇에

집에서 구운 쿠키를 좀 담아 옆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옆집 아주머니는 마마레오가 음식을 나눠주던 그릇이었다고 한참을 바라보시더니

다음날 아랍식 과자를 산처럼 쌓아서 돌려주셨네요. 


이웃끼리 시끄럽다 벽 두들기는게 소통의 전부인 이 아파트에서

외국인 여자가 겁 없이 모르는 집 문을 다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조금은 무서운 할렘st 이민자 동네입니다)


할머니 살림을 쓰다 보니 할머니를 닮게 되나봐요.

저도 이 물건들에 누군가에게 물려줄 좋은 이야기들을 새기면서

흥 넘치고 사랑 넘치는 마마레오처럼 늙어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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