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렁증에서 벗어나려면
"아 오셨군요. 여기 앉으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요즘은 어떠세요?"
안녕하세요, 의사 선생님. 요즘은 그냥 저냥 일하고 할 일하고 그래요. 아 저 부산 여행 갔다 와서 저번 주에 못 왔어요.
"부산 여행 다녀오셨군요. 그러고 보니 여행 갔다 왔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네요. 원래 여행을 잘 안 가시는 걸로 기억하거든요."
맞아요. 코로나 시작하고 여행 한 번도 못 갔어요. 근데 코로나도 코로나인데 원래 여행을 자주 못 갔어요. 사실 여행 자체는 늘 가고 싶었는데, 제가 공부하랴 알바하랴 할 일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코로나 전에도 잘 못 갔어요. 하하.
"그렇군요. 여행이 때로는 삶의 활력이 되기도 하죠. 여행 잘 다녀 오셨네요. 여행은 누구랑 가셨나요?"
아 혼자 갔다 왔어요.
"혼자 여행 가신거에요?"
그냥, 요즘 코로나시국이긴 한데 아무래도 길어지다 보니까 너무 갑갑하고 뭐든지 하기 싫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여행 가기 열흘 전에 예산에 맞게 숙소부터 잡았어요. 갑자기 여행 가기로 결정한거라 일정 맞는 친구도 없었고 코로나니까 차라리 혼자 다니는게 낫겠다 싶더라고요. 사실 뭘 보고 싶어서 간 건 아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무 계획 없이 숙소만 잡고 부산에 갔어요. 처음으로 아무 계획없이 며칠 내내 시간 보낸 건 처음이었던 거 같아요. 일단 가서 부산에 뭐 있는지 보고 구경하러 가고 식당가서 밥 먹고 그랬어요. 그러고 다시 집에 왔어요.
"그렇군요. 음, 여행은 갔다 오셨고... 여행 갔다 와서 아프기 시작한 건가요?"
음, 그런 거 같아요. 여행 갔다 오면 놀다 온 거니까 쉬고 온 거잖아요. 여행 갔다와서 기념품도 돌리고 일도 착착착 잘 하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여행 잘 갔다 왔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부터 속이 울렁거리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냥 뭐 잘 못 먹어서 그런가 싶어서 소화제를 먹었거든요. 그런데도 계속 울렁거려요. 걸을 때도 울렁거리고, 가사가 서 있어도 울렁거리고, 누워도 울렁거려요. 울렁거리는 상태가 계속 이어지는 건 아닌데 몇 번이나 갑자기 울렁거리니까 어디 아픈건가 싶더라고요. 그래서 진료 예약하고 왔어요.
"잘하셨어요. 지금까지 들어봤을 때는 소화 불량일 수도 있겠다 싶네요. 혹시 울렁거리던 상황을 좀 더 이야기해주시겠어요?"
울렁거린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는 퇴근하고 집에 올 때였어요. 사실 일하고 와서 피곤할텐데 그냥 바로 집에 가기 싫어서 집 가는 길의 반대 방향으로 마냥 걷고 있었어요. 그렇게 20분인가 걷다가 이제 집에 가야겠다 싶어서 집에 가려고 뒤돌아서 몇 걸음 걸었더니 갑자기 울렁거리는 거에요. 뭐 먹은 것도 아닌데 갑자기 울렁거려서 당황스러웠어요. 그래도 심하진 않아서 그냥 집에 걸어가려는데 점점 더 울렁거리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그 자리에 서서 하늘 보고 있었어요. 그래도 계속 울렁거리더라고요. 어차피 밤이라서 사람도 별로 없었고 큰 분수댁 있던 광장에 혼자 서 있어서 마스크 잠깐 벗고 숨을 천천히 쉬었어요. 숨을 고르면서 하늘을 보니까 조금씩 울렁임이 잦아들더라고요. 부산 갔다 오고 나서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불규칙하게 울렁거렸어요. 그럴 때마다 참고 일하거나 찬 바람 마시고 하늘 보면 조금 괜찮아지더라고요.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까, 일상 울렁증의 반응이랑 비슷하네요."
일상 울렁증이 뭐죠? 처음 들어요.
"일단, 울렁증은 아시죠? 말 그대로 가슴이 울렁거리는 증상인데요, 쉽게 말해서 멀미에요. 여행 갔다 오셔서 시작한 거면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일상으로 돌아오기 싫은 마음이 생긴 것으로 보여요. 그 마음이 몸에 영향을 줘서 울렁증으로 생겨나는 것이 바로 '일상 울렁증'입니다."
그런 울렁증이 있군요.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맞아 떨어지네요. 그러면 울렁증 약을 먹으면 울렁임이 멈출까요?
"아뇨. 일상 울렁증에는 사실 약이 따로 없습니다. 원하시면 진통제로 체방해드릴 수 있는데 생각하시는 만큼 효과가 없을 수도 있어서 추천해드리지 않아요."
그러면 이 울렁임을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실 일상 울렁증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데 이에 대한 약이 따로 있지는 않아요. 그래서 일상 울렁증으로 병원에 오시는 분들이 어떻게 치료 되었는지는 환자마다 달라요. 일단은 따로 처방전은 드리지 않을게요. 그래도 울렁임이 심해지면 다시 오시고 그 때 진통제나 멀미약 처방해드릴게요."
병원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 울렁증 환자는 창가 자리에 앉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일상 울렁증이라고? 이 울렁임이 멈추려면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어 해야 한다는 말이네. 누구나 여행 갔다 오면 계속 놀고 싶지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텐데. 그럼 평생 이 울렁임을 안고 살아야 하는 건가? 그건 괴로운데.
환자는 버스 밖을 바라보았다. 퇴근 시간이라서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고 그건 옆 차선의 다른 자동차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체된 차들 뒤로 오래된 상가들이 한 줄로 이어져 퇴근하는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모습이 보였고 상가 뒤로 보이는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며 노을이 지고 있었다.
환자는 노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상가들 사이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았고 주황빛으로 빛나는 자동차들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노을을 보면서 노을이 슬프게 아름답다고 떠올렸다. 그 때, 환자는 다시 울렁임을 느꼈다. 그냥 노을을 보는 이 순간에 시간이 멈췄으면. 나는 퇴근하고 일하고 출근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해야겠지. 살아가려면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지. 그래도 싫어. 난 너무 지쳤어.
노을 빛에 반짝이던 환자의 눈에는 눈물 한 줄이 생겼다. 환자는 갑자기 나온 눈물에 놀라서 정면을 바라보고 눈물을 느꼈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울렁임이 멈췄다. 환자는 오히려 깨달았다는 듯이 눈물을 한 줄 두 줄 더 만들어냈다. 눈물은 금방 멈췄고 여자는 다시 노을을 바라보았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여자는 울렁거리지 않았고 같은 이유로 병원을 방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