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끔찍하지만은 않은 혼종
지난 일요일이었던 7월 14일, 서울 퀴어 페스티벌에 참석하기 위해 친구들과 서울시청 앞 광장에 갔다. 내가 서울 퀴어 퍼레이드에 관심을 가진 지 5년 째, 그 동안 늘 그러했듯 광장에는 퀴어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사람과 그들의 존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있었다. 광장의 한 구석은 퀴어 페스티벌 쪽 사람들이, 다른 구석은 '반동성애' 집회 사람들이 가득한 서울시청 항공뷰 사진을 나중에 인터넷 기사에서 봤는데,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나와 완전히 다른 입장으로 대립하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도 많다니........' 서울 퀴어 페스티벌이 나에게 남긴 지배적인 이미지는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반발심이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퍼레이드를 준비하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광장에서 불편함을 느끼며, 나는 박찬욱 감독의 <박쥐>를 떠올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의 2009년 영화. <박쥐>에는 수많은 모순적 이미지가 등장한다. 고결한 신부님이 친구의 아내와 바람을 피는 뱀파이어가 되고, 괴력의 뱀파이어는 햇빛 앞에서 허무할 정도로 취약하고, 치정을 위한 살인이 연인관계에 방해가 되고, 어렵게 쟁취한 사랑은 파국에 달하고, 먹여주고 재워준 사람을 증오하고, 지옥에서 자신을 구해준 이를 병균이라 칭하는 이야기. 썩 편안하지 않은 이 영화를 보고 있자면 어느 새 이 불편한 세계관에 납득하게 된다. '아 맞다, 삶이란 게 원래 이런 혼종이지' 하며.
신부인 상현(송강호)은 이웃의 고통을 직접 덜어줄 수 없는 본인의 무력함에 고통스러워 한다. 뱀파이어가 되고 나서는 뭐든 할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그의 본능적 욕망은 그의 윤리에 사사건건 위배될 뿐이다. 결국 그는 욕망에 굴복해 그를 얽매던 수많은 금기를 깨고, 본인의 모순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 모순을 해롭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존경받는 맹인 노신부는 뱀파이어가 된 상현의 감출 수 없는 생기를 탐하려 애원하며, 영적인 경지에 도달한 사람의 무력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그야말로 본능에 가장 충실한 뱀파이어가 된 태주는 지독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점들을 발견하고 나면 상현의 방황과 영화 속 모든 모순이 오히려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다시 광장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나와 전혀 다른 의견을 가지고 반목하는 이들이 같은 공간에 진을 치고 있는 걸 본 적이 별로 없다. 인터넷 아고라가 활성화 된 후로 더욱 그랬다. 하지만 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매체가 가장 자유롭고 평등한 공론장을 만들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세계는 오히려 그 이후 극단으로 치닫고, 가짜 정보와 선동이 판치는 세상에 살게 되었다.
왜 그럴까? 나는 인터넷의 발달로 개개인이 원하지 않는 걸 손쉽게 배제할 수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만 잔뜩 팔로우할 수 있는 SNS처럼 말이다. 우리는 점점 익숙한 것 밖의 세계를 다루는 법을 잊어버리고 왜곡된 세계관을 단단히 구축해왔다.
물론 인터넷의 발달로 우리가 누리게 된 것도 무수히 많은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실현된 원치 않는 공간을 무한히 피해갈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이 홀로 존재했을 때, 세상은 화해 없는 극단의 대결장으로 전락할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우리에겐 모순적인 공론장이 필요하고, 애초 그것이 공론장이 가지는 의의이다. 나에게는 그런 공간이 서로 정반대의 집회가 열리던 서울시청 광장이었다.
이런 인식론적인 다짐에도 불구하고, <박쥐>는 내게 엄청난 흥분을 주는 작품은 아니었다.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볼 때 나의 정신의 주파수와 공명하는 듯한 충격을 꾸준히 받아온 것을 감안하면 더 이상한 일이다. 어느 정도는 <박쥐>의 대본이 이미 충분히 훌륭해서, 영화의 탈을 썼을 때 상대적으로 빛을 덜 얻었기 때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박찬욱/정서경의 훌륭한 대본도 절대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태주를 연기한 김옥빈의 연기이다. 김옥빈의 태주는 끔찍하게 지겨운 삶과 흥분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삶의 상반된 모습을 멋지게 표현한다. 그리고 자칫 단순 악역으로 보일 이 역할을 미워할 수 없는 매력덩어리로 변모시켜,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김옥빈이 이런 연기를 실현하는 데 박찬욱 감독은 어디까지 연기지도를 했을까, 순서를 알 수 없는 궁금증이 다시 떠올랐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미술적으로도 수려하지만, 매 작품이 관객에게 선이 굵은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내가 아주 좋아한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을 거의 다 챙겨봤는데, 점점 그의 세계관이 나의 생각을 이루는 단단한 줄기가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지나치게 박 감독의 영향권 안에 머물지 않기 위해 적정거리를 유지하려 나름대로 애쓰는 중이다. 게으른 안락함을 피하고 부지런하게 불편함을 접하기 위해서. 이마저도 <박쥐>스러운 것을 보니 나는 점점 박찬욱 세계관의 사람이 되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