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몰라요
이미테이션 게임. 기계의 사고력을 증명하기 위한 테스트로, 만약 컴퓨터의 반응을 진짜 인간의 반응과 구별할 수 없다면, 그 컴퓨터는 생각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동시에 2014년에 개봉한 영화 제목으로, 영화의 주인공은 이미테이션게임의 개념을 처음 주장한 과학자 앨런 튜링이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튜링이 얼마나 당시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인물, 존재해선 안 되는 인물이었는지 묘사한다. 사교성이 현저히 떨어져 직장 상사와 동료들에게 직설적인 말을 던져 불이익을 받기 일수며, 동성애자이고, 기밀 군사 임무에서 공을 세운 전력도 있지만 냉전 시대에 러시아 스파이로 의심받는다. 세상과 어울리지 않기는 그의 동료 조앤 클라크도 마찬가지이다. 조앤은 수많은 경쟁자들 사이에서도 두드러질 만큼 똑똑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실력을 의심받고, 공정한 테스트를 받을 자격조차 박탈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야말로 세상의 별종인 그들은, 언제나 자신을 감추고 깎아내야 한다. 그들이 살아남는 방식은 그야말로 이미테이션 게임 자체이다. 동료들과 어울리기 위해 개그를 연습하고, 가짜 결혼을 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남긴 기록을 불태워버리고, 원치 않는 스파이 일을 떠안고, 소중한 사람과 결별을 선언하고, 성정체성을 포기한다. 타인이 그들을 어느정도 사회화된 인간으로 바라볼 때까지. 가장 소중한 자아를 지키기 위해 그나마 덜 핵심적인 자아와 덜 소중한 사람을 떼어내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은 상처투성이가 된다.
튜링은 동성애라는 범죄를 저지른 죗값으로 징역형과 화학적 거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후자를 선택한다. 신문에서 그의 동성애 범죄에 대한 기사를 읽은 조앤이 찾아와 묻자 그는 말한다. “당연히 치료를 택했죠 난.. 감옥에서는 연구할 수 없으니까.” 연구를 하지 못한다는 상상만으로도 그는 무너지듯 흐느낀다.
연구가 이 모든 걸 포기할 만큼 중요한 것인가? 나는 그의 선택에 공감할수도 그를 이해할수도 없다. 단지 그의 선택에 아주 큰 무게가 달려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연구를 이어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기에,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성정체성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영화 속 튜링의 천재성은 아주 특별한 개인의 아주 희귀한 능력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는 가장 핵심적인 자아이며, 타인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특징이다.
물론 지금 영국 사회는 영화 속에서 그려진 모습과는 다르다. 현재 영국은 동성혼이 합법이고, ‘당신은 여자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며, 튜링은 사후 사면되었고 그가 받은 유죄판결은 번복되었다. 이들이 살던 시대의 윤리는 시간이 지나며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된 한 예시가 되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조금 덜 야만적이라는 위안보다는, 지금의 나 또한 그 시대의 사람들처럼 숨쉬듯이 누군가를 지우고 부정하고 있을 것이라는 불편한 깨달음을 준다. 역사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고단한 마음으로 살았을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런 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잘라내고 있지 않을까. 내가 최소한의 사회성이라고 여기는 것 또한 야만의 다른 모양이 아닐까.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그들을 인지하지조차 못하는 내 무지함이 미안할 뿐이다.
이 영화는 실제로 존재했던 한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시대와 사회를 관통하여 존재했던 ‘별종’에 대한 미안함, 위로, 용기를 전해준다. 그리고 튜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 유일한 사람이 조앤으로, 조앤의 능력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의심하지 않은 사람을 튜링으로 그려, 서로를 진정 알아봐주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과 능력은 별종들에게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조앤이 튜링에게 건넨 마지막 대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당신이 평범하지 않기에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되었는걸요. 난 믿어요.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을 해내는 거라고.”
그리고 나서도 영화는 튜링의 업적이 우리가 오늘날 컴퓨터라고 부르는 것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을 언급한다. 이는 컴퓨터의 시대에 사는 우리가 튜링에게 바치는 헌사인 동시에 이 1시간 53분짜리 위로가 공허한 응원으로 휘발되어버리지 않게 붙잡아주는 물증이다.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한 이 영화의 각본가 그레이엄 무어는 수상 소감에서 다시금 말한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속하는 존재입니다. 이상해도 좋아요, 달라도 좋아요.”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위로를 얻을 수 있는 별종인가? 아니면 당혹스런 표정으로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군요’ 라고 대답할 뿐인가? 나는 아직도 여기에 뚜렷한 답을 하지 못한다. 어떤 답을 하는지가 애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내가 누구고, 당신이 누구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눈앞에 있는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뿐이다. 어쩌면 내가 평생 벗을 수 없는 무지라는 색안경의 존재를 미안해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