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에서 자음 H는 묵음이고, 모음 뒤에 붙는 N이나 M은 ㅇ받침의 비음이 된다. 그러니까 프랑스어권 사람이 H로 시작하고 N으로 끝나는 내 이름의 영어식 로마자 표기를 보고 [해은]과 비슷한 발음을 유추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애.....앵?"은 보통이요, "애..응..?"이면 양반이다.
로잔의 영어생활권에 흡수되지 않은 지난 1년간은 [해은]으로 불리는 걸 진작에 포기했다. 대신 사적인 자리에서는 Hannah라고 나를 소개했다. 오랫동안 '은'에서 오는 곱고 여린 이미지가 마음에 안 들어 열린 발음을 쓰는 중성적인 이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영화 컨택트(Arrival)에서, (짝꿍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리학자의 에고를 뿌셔버리는 언어학자 해나 캐릭터에 깊은 감명을 받은 영향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쉬운 스펠링은 덤.
그렇게 정리되는 줄 알았는데, 아뿔싸, Hannah는 나에게 전혀 달라붙지 않았다. 프랑스어 생활권에서 저 이름을 쓰면 나는 [해나]가 아니라 [아ㄴ나]가 됐고, 어쩌다 영어 하는 사람을 만나서 [해ㅏ나]로 불리면 [해나]가 아니라 [해ㅏ나]라서 귀에 착 감기지가 않았다. ㅇ와 ㅎ의 사이가, ㅐ와 ㅐㅏ의 사이가 이렇게나 멀었다니. 게다가 보험회사와 통신사에서 오는 메일을 제외하고는 나를 Haeeun이라고 부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름은 부르는 거지 읽는 게 아닌데, 괜한 짓을 했구나.
학기가 시작됐고, 다시 나를 Haeeun이라고 소개하기로 했다. 번거로워도 스펠링을 하나하나 불러주고 [해은]이라고 읽어준다. 그러면 상대방은 대부분 [해ㅐㄴ]이나 [해ㅡㄴ], [핸]에 가까운 소리를 낸다.
한국에서 만나온 친구들이 어느 정도 친해지고 나서 부르는 애칭이던 [핸]은 여기서 나의 이름이 되었다. 내 이름을 정확히 불러주려는 성의가 그들을 [해은]의 영역에서 [핸]의 영역으로 들여보내준 기분이 들어 내적 친밀감이 올라간다. 게다가 [핸]에는 [은]도 없으니 내 마음에 안 들 것도 별로 없다.
[해ㅏ나]나 [아ㄴ나]이 아니라 다시 [핸]으로 불리게 된 이후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좀 더 신경써서 발음하게 됐다. [미ㄲㅔㅔㄹ], [나따-ㄹ리아], [나타-샤], [우-(타!)], [하ㅍ하엘], [빠블로]. 여전히 내 영어발음에는 한국어 액센트가 강하고 (여태 없다가 갑자기 어디서 생겨났다), 개강한 순간부터 프랑스어 발음은 어디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지만, 이름을 부를 때 만큼은 세계의 모든 언어에 통달한 마음가짐으로 스스로를 무장하려는 중이다.
그들에게도 자기 이름의 유사 모국어 발음과 얽힌 좋은 기억이 많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