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대상을 부를 일이 있다는 것이다. 대상을 부를 일이 있다는 것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깊든 얕든 대상과 이미 얽혀 들었다는 것이다. 고유명사로서의 이름을 갖는다는 것, 고유명사로 지어진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기억하게 된다는 것, 그건 관계의 시작이요 부름과 불림의 시작이겠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한 이름을 부르고 불리는 일은 피할 수 없다. 집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혹은 그 어떤 곳에서라도 온통 이름 붙은 사람들과 관계 맺고 살다 보면 꽤 많은 이름을 마주하게 된다. 그건 꽤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살다 보면 그런 이름이 생기기도 한다. 이전에는 입말처럼 불렀으나 이제는 부르지 않는 이름. 혹은 부를 수 없는 이름. 부를 일 없는 이름. 그런 이름은 입에서 죽는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문득 안부나 묻자고 입에 올린대도 발음하는 일조차 어색하다. 그러나 어떤 이름은 입에선 죽었을지라도 몸과 마음 깊숙한 어느 곳에 생생히 살아있어서, 비슷한 발음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내려앉게 만든다.
지난겨울,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손님으로 온 남녀가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안 와?”
“윤재 오고 있대.”
입에서는 죽었지만 마음에, 몸에 생생히 살아남아 자리를 튼 이름, 도무지 배설되지도 희석되지도 않는 이름. 그런 이름이 내게는 ‘윤재’였다. 마음이 동요하기도 전에 몸이 멈췄다. 긴 원통형의 무언가가 내 몸을 수직으로 뚫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고, 움직일 수 없었으며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건 고작해야 이 초 남짓한 순간이어서 남들이 보기엔 아주 잠깐 멈칫하는 정도였겠다. 그러나 내가 이 초 동안 몸과 마음으로 받아낸 일련의 파동엔 윤재와 내가 함께 보냈던 오랜 시간과, 그 속의 사건들과, 주고받은 모든 말과 행동이 촘촘히 쌓여있었다. 그건 아주 힘이 셌다. 단번에 나를 흔들고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로.
물론 손님들이 말하는 윤재는 내가 아는 윤재가 아니었고, 그런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윤재는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윤재’가 아니라 ‘운재’ 같은, 비슷한 발음의 다른 이름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뒤늦게 합류한 키가 크고 우람한 남자에게 누군가 ‘윤재야’하고 말을 걸었을 때도,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윤재가 내가 아는 윤재가 아니라는 걸 정확히 확인한 뒤에도 나는 이미 동요하기 시작한 몸과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윤재’든 ‘운재’든, 내게 있어 그 비슷한 발음이 뜻하는 것은 오직 내가 아는 윤재, 키가 나보다 한 뼘 정도 크고 너털웃음을 곧잘 짓던 윤재뿐이기 때문이다. ‘윤재’라는 이름이 내게는 고유명사를 넘어 유일(唯一) 명사가 된 셈이다.
이런 경험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겠다. 어느 날 내가 멀리 뛰어가는 친구를 ‘민정아’하고 불러 세우던 일이 지나가던 낯선 이의 발걸음을 붙잡았을 수도 있겠다. 내가 불러 세우려던 민정이는 안 멈추고 ‘민정’이라는 이름을 유일 명사로 인지하고 있던 애꿎은 이가 불러 세워지는 일. 이런 일을 생각하면 이름이 유일하지 않다는 사실이 짓궂게 느껴지기도,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살면서 윤재라는 이름을 마주치는 일이야 언제고 일어날 것이다. 어느 날은 짓궂은 우연 정도로 여길 테고 어느 날은 벗어날 수 없는 저주처럼 느껴지겠지만, 가능하다면 다행이라고 느끼는 날도 더러 있기를 바란다. 윤재의 이름 뒤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던 날보다 힘껏 웃음을 터뜨리다 넘어지던 날이 더 많았으니까. 대체 왜 그랬냐는 물음 아래 방황하던 밤의 기억이 불쑥불쑥 고개를 디밀어도, 함께 밤바다를 쏘다니며 웃고 떠들던 기억이 아직도 나를 먹이고 살리니까. 무엇보다 그와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선 것과 별개로, 다시는 볼 수도 없고 봐서는 안 될 사이가 된 것과 별개로, 나는 여전히 윤재를 아끼고 사랑하므로 그렇다. 윤재를 몰랐더라면 나는 윤재를 알았을 때보다 더 많이 울었을 것이다. 그러니 윤재의 이름을 듣고 잠시 멈춰 윤재를 생각하는 일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할 것이다.
처음으로 윤재를 부르던 순간을 더듬어 기억해본다. 맨 처음 그를 불렀을 때, 나는 경계심이 잔뜩 낀 얼굴로 ‘저…’하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부대끼며 일하느라 몇 번 대화가 오간 뒤에는 ‘윤재 님’하고 그를 불러 세웠고, 유쾌한 대화가 오간 뒤에는 ‘윤재야’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그러다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용건 없이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서 나는 그에게 이런저런 별명을 지어 부르기도 했다. 우리끼리만 아는 서로의 이름을 갖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이름을 짓고, 붙이고, 불렀다. 그럴수록 나는 그와 깊게 얽혔다가, 실밥처럼 풀어졌다가, 다시 얽혀 들기를 반복했다.
만약 이 모든 과정을 알고 처음으로 돌아간대도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를 것이다. ‘저…’로 시작해 다양한 이름들로 그를 불렀다가, 끝내 어떤 이름도 입에 올리지 못하는 그 과정을 기꺼이 겪어낼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이름은 언제까지고 살아남아 내 몸과 마음 깊숙한 곳에 생생히 자리할 것이다. 입에서는 잊힌대도. 그래, 입에서는 잊힌대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