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늘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랐다. 괜찮다는 것은 괜찮지 않을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여유가 있다는 뜻이니까. '괜찮아.' 그렇게 말하고 속으로 끙끙대는 사람 말고, 진심으로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괜찮음이 나를 썩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주기도 할 것 같았다.
괴로운 순간이 올 때마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마음으로 견뎠다. 지긋지긋하게 들러붙는 가난이나 차마 떨쳐낼 수 없던 가족들에게서도, 손쓸 도리 없던 이별에게서도, 손쓸 도리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이별에 대해서도, 때마다 발견하게 되는 내 안의 수많은 결핍들에게서도 나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이런 행동은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구나, 이런 마음은 서로에게 좋지 않구나, 어떤 문제는 해결하려 들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구나…. 그런 것들을 배운 셈 치면 마음이 제법 괜찮아졌다. 이 모든 이별과 가난과 환경은, 아주 뜬금없는 시련은, 내가 무언가를 배우고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수순이라는 믿음. 그 맹신이 나를 괜찮게 했다.
빈 책장을 채우듯 나는 내가 배운 것들을 마음 한 쪽에 차곡차곡 정리해두었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같은 이유로 소중한 이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더 좋은 말과 행동과 선택을 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내게 다가올 새로운 시간들을, 인연과 기회들을 더 소중히 대하고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런 노력은 무용하지 않았는지 나는 조금씩, 더디지만 분명하게 괜찮은 사람이 되어갔다. 새롭게 다가온 좋은 사람들과 기회들을 붙잡아둘 수 있었고, 이따금 마음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나도 비교적 쉽게 괜찮아졌다. 주변을 이룬 모든 것들이 좋진 않아도 나쁘진 않게, 이만하면 괜찮게 느껴졌다. 내가 원하던 삶의 언저리에 가 닿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따금, 아주 작은 의문이 일곤 했다. 이렇게 배우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다른 기회와 인연을 맞이하고 붙잡아두고… 이게 정말 내가 원했던 걸까? 그런 물음 앞에 서면 목구멍이 작아지는 것 같았다. 괜찮다고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괜찮지 않게 느껴졌다.
솔직해지자면 배워서 얻은 것보다 배우는 동안 잃은 것들이 더 많다. 한 시절 내내 얼굴만 보아도 까무룩 뒤집어졌던 친구들, 팔이 저리도록 내게 팔배게를 해주던 애인들을 나는 잃었다. 그들과의 이별 속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고, 그 배움이 내게 도움이 됐던 것과 별개로, 내가 좀 더 타인을 배려할 수 있고 나의 잘못과 결핍들을 경계할 수 있게 된 것과 별개로 나는 그들을 잃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 된다 해도 그들을 잃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내 결핍을 되돌아보며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던 것은 앞으로 다가올 관계에 대비하려는 마음이 아니었다. 아직 만나지 못한 누군가가 아니라 이미 나를 알고 내가 아는 이들, 좋고 나쁜 마음을 나누었던 이들, 끝끝내 좋았던 이들, 그러나 더 이상 전과 같은 얼굴로 마주할 수 없게 된 이들. 나는 그들을 위해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랬다. 가난하고 소란한 가정에서 태어나 온갖 수치와 모욕을 겪었고, 마음 깊이 애정 하던 사람들을 자주 놓쳤고, 그래서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배우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알고 있다. 가난하지 않고, 화목한 집에서 사랑받으며 자라고, 절친했던 친구들이나 애인들과 이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좋았을 것이다.
나를 지탱하던 배움은 속절없이 겪어버린 시절에 대한 눈가림에 불과했다. 나는 그동안 망가진 모든 과거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고, 내게 벌어진 일들을 이해하려 했다가, 이해하지 못해서 울다가, 받아들일 수 있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끝내 받아들이고서 괜찮다고 되뇌었다. 내가 괜찮지 않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서, 내가 조금 전 아주 소중한 것을 잃었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서, 괜찮다, 괜찮다. 나는 괜찮고 지금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그렇게 되뇐 뒤 한 움큼의 배움을 쥐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한 움큼을 제외한 모든 슬픔을 외면하고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자각했을 때 나는 한동안 무너져있었다. 이제 와 괜찮다는 게, 괜찮은 사람이라는 게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무너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나는 일전의 배움으로 알고 있었다. 지나온 길에 내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부스러져있는 것과 별개로 나는 지금 이곳에 살아있고, 그러니 오늘 해야 할 일들을 해내야 하고, 오늘 분의 지난함을 견뎌야 했다. 그러는 동안 이미 벌어진 일들은 꿈에서도 돌이킬 수 없고, 이미 떠난 이들은 꿈에서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자주 상기시켰다. 내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려고 애썼다.
요즈음 나는 썩 괜찮은 마음으로 살고 있다. 괜찮은 마음으로 괜찮은 사람들과 괜찮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러다가도 어느 날엔 괜찮지 않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어느 날 길을 걷다 불 꺼진 집 앞에서 문득 걸음이 멈췄을 때, 늦은 밤 베란다에 서서 창밖의 불빛들을 바라볼 때, 우연히 옛 사람들과의 사진을 발견하고 슬며시 웃을 때 그러했듯이. 이제 와 괜찮은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우는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날은 분명히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날이 찾아오는 것과 별개로 나는 계속해서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스쳐 지나가는 크고 작은 배움을 가능한 한 놓치지 않고, 마음속에 차곡차곡 정리해 두어야 한다. 여전히 나는 나에게, 아직 내 곁을 지켜주는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보다 선량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덜 무례하고 덜 차가운 사람으로 오래 기억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나와 내 삶에 대한 예의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내 작은 현명함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꿈에서도 돌아오지 않던 이들을 우연히 만날지도 모른다는, 더 괜찮은 모습으로 그들을 다시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미련함도 지킬 것이다. 그런 믿음이 나를 괜찮게 만들 것이라고 믿으면서. 불분명한 모든 것들을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