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依支)
다른 것에 마음을 기대어 도움을 받음. 또는 그렇게 하는 대상.
의존(依存)
다른 것에 의지하여 존재함.
*
'사람에게 절대 의존하지 말자. 의지도 하지 말자.'
마음이 유약해져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싶어 질 때마다 내가 늘 되뇌는 말이다. 이런 마음을 지니고 산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해보면 딱 하나의 시점을 명확하게 댈 수는 없을 것 같다. 자신을 돌보는 일조차 버거워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내는 사람들, 그리하여 타인에게 내어줄 어깨가 도무지 없는 사람들을 지켜본 순간이 있었고, 언젠가부터 나도 그런 사람이 돼버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었다. 어느 날엔 에세이에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을 위로하지 못한다. 잠깐의 위안이 될 수는 있어도.'라고 썼고, 그 문장을 쓰기까지 내가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누군가 내게 의지하는 일에 실패하는 여러 서글픈 일을 겪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내주었고, 믿었고, 나도 모르게 의지했으며 어쩌면 의존까지도 했던, 몹시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과 이별한 순간들이 거듭 있었다.
지난해 나는 처음으로 정신과를 찾았다.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내가 의존하는 일에 목말라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고, 사랑받는 일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타인이 내게 저지르는 무례함을 필요 이상으로 용인하고 있었고, 더는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관계를 구태여 붙잡고 있었다. 그럴수록 내가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뒤에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상담을 마무리하라는 간호사의 채근이 거듭돼도 의사 선생님은 꿋꿋하게 내 이야기를 들었고, 이렇게 말했다.
“왜 그런 일을 당하고도 그 사람을 놓지 못하는지 알아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의존해야 돼서 그래요.”
덤덤하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슨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옷소매로 눈을 힘주어 닦으며 울음을 그치려고 애썼다. 의존하기 위해 사랑받고자 했고, 사랑받기 위해 필요 이상의 무례를 용인했던 지난 날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내게 의존에 대한 결핍이 있다는 걸 알게된 뒤,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누구를 만나든 이 사람도 언제고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뒀고, 마음이 깊어지려 할 때마다 그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일을 하다가, 밥을 먹다가, 잠자리에 누웠다가 구태여 그런 생각에 잠기곤 한다. 자리를 털고 떠나간 이들이 다시 돌아오는, 그들과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는,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우리에게 아무 문제도 없던 때로 돌아가 실없는 소리를 하며 자지러지게 웃을 수 있다면 어떨까 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바라게 된다.
나는 행여나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아래, 혹은 마음을 내어주고 온전히 등을 맡길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희망 아래 이따금 생각한다. 곁에 있는 사람이 언제고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곁을 내어주는 동안 후회 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 돌연 상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떠난대도 그동안 고마웠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떠난 이를 원망하거나 질책하지 않고, 온전히 그의 행복을 기원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무엇보다 혼자 남은 나를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나의 새로운 행복을 기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그리워할지언정 그리움에 얽매이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 그리하여 다시는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겠다고 이 갈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 다음날, 혹은 그다음 날 즈음 털고 일어나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그것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여유와 강인함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이별한 사람과 이제 막 관계를 맺기 시작할 무렵, 그에게 의지하게 될까 봐 지레 겁을 먹은 적이 있다. 그도 언젠가 나를 떠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그에게 전했을 때,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정이 많고 사랑이 많은 애니까 그건 분명 좋은 일일 거야. 떠난 사람은 추억으로 남겨두고 그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할 만큼의 사랑도 네게 있어."
그 말을 믿고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예감대로 나를 떠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마음 깊이 애정하고 그 말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