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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로간 Jul 02. 2020

영화의 기억, 기억의 영화

고다르의 영화에 관한 기억, 기억의 표출 도구로서의 영화

  “여기는 없는 게 없네.” 대형마트에 들어서면 들리는 이 음성은 나를 존재론적 고찰로 이끈다. “없는 것”은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을까? 나는 영화 촬영 현장에서 기억을 떠올린다. 배우가 연기를 모두 마치고 모두 다음 촬영 장소로의 이동을 위해 철수한다. 하지만 모두가 떠나버린 그곳에는 두 사람이 남아있다. 붐 맨과 녹음기사. 이 둘은 모두가 떠나 텅 비어버린 공간에서 녹음을 하고 있다. 그들이 녹음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소리이다. 배우의 대사도 배우의 움직임이 만드는 소리도 아닌, ‘없는 것’의 소리를 녹음한다. 하지만 이 ‘없는 것’의 소리는 중요하다. 만약 ‘없는 것’의 소리가 없는 영화를 본다면 분명 모두가 ‘없는 것’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대형마트로 들어와 매대로 가자. 매대에는 과일 바구니들이 있다. 과일 바구니들을 유심히 보다 문득 다른 과일 바구니와 다른 바구니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외칠 것이다. “여기요! 여기 없는 게 있어요.”

  눈물과 함께 한 영화를 한 편 보고 나온 나는 한동안 그 감동을 다시 느끼기 위해 기억을 더듬는다. 그 영화의 풍경, 배우의 표정, 그리고 음성과 그 뒤로 들리는 음악. 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이 영화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점차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일 년 뒤 나는 그 영화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머리에는 그 영화에 관한 어떤 이미지도 사운드도 없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혹은 그 영화를 다시금 소환하는 자극이 있다면, 나는 머리 안에 흩어져있던 기억의 원자(기억의 최소 형태, 하지만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들을 모아 기억의 분자(단일한 특성을 띄는 기억으로 존재할 수 있는 최소 단위)를 만들 것이다. 이렇게 소환된 기억이 표출 행위(언어, 텍스트, 혹은 어떤 물질화된 형태)를 거치지 못한다면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없는 원자 상태로 다시 흩어질 것이다. 나의 머리 안에는 이런 존재를 인식할 수 없는 기억의 원자들이 가득하다.  

  표출의 행위를 거치지 않은 기억의 분자는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 일련의 자극은 최소화된 단위로서의 기억의 분자를 생성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신 속에서의 표상의 상태로 잠시 존재할 뿐이다. 그 기억을 지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물질화를 위한 표출 행위다. 생성되었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정신 속의 기억을 잡기 위해 하는 대표적인 행위는 ‘글쓰기’다. 하지만 글은 기억을 온전히 잡아내지 못한다. 오늘 먹은 국수에 대한 일기를 쓴다고 가정해보자. 그 글은 내가 경험한 국수의 모든 감각을 반영하지 못한다. 우리는 글에서 국수의 이미지를 볼 수도, 국수를 먹는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글은 기억을 붙잡는 가장 손쉬운 도구지만, 그것에는 한계가 있다.

  NFB(National Film Board of Canada)에서 발간한 브로슈어에서 이런 문구를 본 기억이 있다. “Sometimes the cinema is better than the book.” 영화가 때론 우리의 기억을 붙잡는데 더 나은 도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글을 쓰는 행위보다 더 힘든 과정을 겪어야 하지만, 영화는 기억이 더 온전한 형태로 물질화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나는 그 가능성을 고다르의 영화 <영화의 역사>에서 보았다. 고다르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하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영화에 대한 기억 원자를 분자의 형태로 생성한다. 각각 생성된 개별적인 기억 분자들은 서로 연상과 중첩의 과정을 통해 다른 기억의 분자들과 결합한다. 결국 영화에 관한 개별의 기억 분자들은 새롭게 구성되어 영화의 역사를 형성해나간다. 고다르는 자신의 기억을 영화로 물질화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래서 고다르는 서재에서 책을 뽑아들며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을 속삭이는 것일지 모른다.



  고다르의 기억 표출 과정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두 측면을 유념하며 영화에 접근해야 한다. 하나는 표출 행위자로서의 고다르, 또 다른 하나는 표출 결과로 물질화된 기억이다. 이는 간단하게 구별할 수 있다. 표출 행위자로서의 고다르는 말 그대로 그가 영화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타자를 치고, 시가를 피고, 책을 읽는 이미지적 개입과 육성을 통한 사운드적 개입이다. 영화에서의 고다르는 이런 표출 행위 과정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달한다. 표출의 과정은 내가 가지고 있는 표상-기의를 특정한 형식의 물질-기표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필연성이 없다. 때문에 이 둘을 연결 짓는 과정은 즉각적일 수 없다. 고다르의 음성이 단번에 완성된 형태의 문장을 형성하지 못하고 단어와 단어의 반복적인 발화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더듬더듬 단어를 반복하고, 지우고, 다시 쓰는 과정을 통해 문장을 만들어간다. 결국 고다르 자신이 직접 이미지와 사운드로 영화에 개입하는 것은 이런 과정에 대한 확실한 증거다. 고다르의 이미지도 음성도 나오지 않는 순간에 발생하는 타자기의 사운드 역시 그가 표출 행위 과정 중임을 알려준다.

  다른 측면인 표출 결과로 물질화된 기억에 대해 살펴보자. 그에 앞서 물질화 이전의 기억, 이제 막 생성된 기억의 분자에 대해 정리해야 한다. 표상으로 생성된 기억은 이미지와 사운드(대체로 언어)의 형태를 띤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 대상을 경험한다. 하지만 기억은 오감을 모두 저장하지 못한다. 단편영화 <산책가>(2009, 김예영, 김영근)는 경험이 어떻게 기억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예다. 시각장애인인 동생은 병원에 입원한 누나를 산책시켜주기 위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지도를 만든다. 누나는 눈을 감고서 동생의 손을 잡고 그가 만든 촉지도 위를 더듬으며 산책을 떠난다. 자 이제 동생의 손을 잡고 모래사장으로 가보자. 까끌까끌한 촉감만이 전달된다. 동생이 모래사장이라는 언급을 하기 전까지 이 감각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동생이 모래사장에 도착했음을 언급한 이후에야 그것이 모래임을 인지 할 수 있다. 다시 영화 밖 관객으로 돌아가자. 관객인 나는 모래사장의 촉각을 느낄 수 없다. 시각장애인의 이미지로 구성된 영화에는 모래사장에 대한 상징화된 어떤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동생이 ‘모래’라는 언급을 하기 전까지 나는 접해볼 수 없었던 이미지를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모래’라는 언어화된 표상이 나타난 이후에야 기억 속에 ‘상징화된 이미지’를 불러낸다. 혹은 모래사장에 특징적 이미지로서의 경험이 있다면, 예컨대 해운대 백사장에서의 경험이 있다면, 우리는 그 경험을 통한 ‘기억의 이미지’를 소환할 것이다. 미각과 후각 역시 같은 방식으로 기억 속에서 이미지와 언어의 형태를 띤다.

  고다르의 물질화된 기억 역시 이런 이미지와 사운드의 형태를 기반으로 한다. 파편화되고 변형된 형태의 이미지의 출몰, 분절적인 사운드와 음성의 개입. 영화에 대한 고다르의 기억은 이미지와 사운드의 형태로 저장되었고, 생성되었고, 물질화된다. 하지만 단순히 이런 물질화된 기억의 파편들만으로는 어떤 의미도 생성할 수 없다. 고다르가 결국 표출 행위로 물질화된 기억들을 묶는 것은 자신의 음성을 거쳐 완성되어가는 텍스트다. 앞서 나는 책 보다 영화가 더 나은 기억의 물질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고다르의 이 영화는 그 자신의 물질화된 기억이라고 주장했다. 때문에 고다르는 기억을 묶는 재구성의 과정에서의 텍스트의 사용은 이질적이다. 고다르가 물질화하는 것은 영화인가? 텍스트인가? 하지만 고다르가 만들어가는 텍스트의 형태를 들여다보면 의문은 해소된다. 고다르가 만들어가는 텍스트는 우리가 보는 일반적인 텍스트와는 다른 형태를 띤다. 단어들은 분절적이고 통상적이지 않은 형태를 띤다. 단어가 완결되지 않은 채 줄이 바뀌거나, 겹쳐지는 등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이것은 이 텍스트가 결국은 우리가 아는 그것이 아닌 이미지임을 드러낸다. 텍스트 역시 기억 속에 존재하지 못한다. 내가 읽는 텍스트들은 언어의 형태 혹은 이미지의 형태로 기억 속에 존재한다. 가령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구나 문구를 상상해보자. 나는 그 텍스트들을 글자 형태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은 언어의 형태로 저장된다. 신영복 선생님의 글귀 같이 강렬한 이미지로서의 텍스트의 경우는 또 이미지의 형태로 저장된다. 고다르는 결국 자신의 기억들을 묶어 새로운 의미로서의 텍스트가 아닌 또 다른 이미지를 생성한다.


영화의 역사(들) Histoire(s) du cinéma (1988 / Jean Luc God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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