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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로간 Jul 04. 2020

달빛 아래서 흑인 소년은 파랗게 보인다

달을 통한 이미지와 감응에 대한 고찰


 우리는 빛의 근원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대상에게 닿아 반사된 빛이다. 우리는 대상에게 닿아 반사된 빛을 보지만 그 빛에 닿은 자신의 모습은 보지 못한다. 나는 달빛 아래 파랗게 물든 흑인 소년의 모습을 보지만 달빛 아래 선 내 모습은 보지 못했다. 나에게 어떤 이미지는 스투디움을 줬고 어떤 이미지는 푼쿠툼을 줬지만, 나는 그 어떤 이미지가 주는 빛에 감응하는 내 자신을 돌아본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미지와 나의 감응을 되돌아보려고 한다. 다시 말해 이 글은 이미지로 인해 나에게서 발현한 것에 대해 정리하는 과정이다.

E.T (1982 / Steven Spielberg)
미래는 고양이처럼 The Future (2011 / Miranda July)


 ‘달빛 아래’에서 시작한 바와 같이 나에게 달은 푼쿠툼이 강한 이미지다. 나는 외계인이 달을 향해 자전거를 타는 장면(E.T, 1982)을 보며 환상에 빠져들었고, 실연당한 남자가 달을 통해 시간을 돌리려는 장면(미래는 고양이처럼, 2011)을 보며 슬픔을 느꼈고, 남녀가 달빛 아래서 지구 주위를 돌 수밖에 없는 달의 이야기를 하는 장면(미술관 옆 동물원, 1998)을 보며 설렘을 느꼈다. 이미지와의 감응을 되돌아보니 내 머릿속 달의 이미지를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서 달의 이미지, 나에게 다가온 푼쿠툼, 그리고 달빛으로 인해 나에게서 발현한 것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달나라 여행 : 상상의 기제로서의 이미지

달나라 여행 Le Voyage Dans La Lune (1902 /Georges Méliès)


 나는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만드는 일을 할 때마다 뤼미에르의 영화와 멜리어스의 영화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이들은 ‘달나라 여행’을 통해 나와의 소통을 시작하지만, 정작 나는 머리가 한창 굵은 다음에서야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지금 영화와는 거리가 좀 있는 멜리어스의 영화 속에는 주인공도 이입할 감정도 없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충격에 빠졌었다. 우주선과 CG는커녕 달에서 토끼가 방아 찣는 상상이나 하던 그때에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이런 충격은 나뿐 아니라 아이들도 같아서, 함께 멜리어스의 ‘달’ 보기를 지속하게 되었다.

 영화의 역사적 측면을 이해하고, 지금과 과거의 비교를 통한 특징을 알아보기 위해 시작한 ‘달나라 여행’ 감상은 아이들의 상상을 자극하는데 오히려 더 도움이 됐다. 아이들과 영화를 만들기 위해 거쳐야 하는 많은 과정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봐도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면 아이들이 상상하는 일은 드물다. 하물며 이야기를 상상하고 그것으로 글을 쓰는 행위는 분명 지극히 어려운 작업이다. 때문에 나는 아이들에게 상상 속 달나라 여행을 권유한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들이 흔한 애니메이션이나 SF영화 속 달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온다. 하지만 상상을 그리는 정도에서 그친 대부분의 아이들이 이야기를 상상하고 구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발함보다는 시도 행위 그 자체다. 뻔한 상상이라도 제약 없이 창작 행위에 접근하게 만들 수 있는 이미지는 달 말고는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달로 간 사내 :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이미지

달로 간 사내(2014 / 정의행)


 상상의 기제로서의 달의 이미지는 또한 나와 감응해 대상으로서의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달로 간 사내’는 어릴 적 달로 가기 위해 방귀를 참다 실패한 사내가 성인이 되어 짝사랑하던 대상 앞에서 참던 방귀가 터져 달로 날아가는 영화다. 나는 이 영화에서 짝사랑의 대상,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이미지로 달을 사용했다. 달의 이미지는 비단 나만 욕망의 대상으로서 사용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달이라는 공간에 도달한 SF 장르의 영화를 제외한 수많은 영화들에서 달은 욕망의 대상과 상징으로서 사용되었다. 진부하게 사용되었던 남녀의 정사 씬 너머로 보이는 휘영청 밝은 달과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날 밤에 떠있는 으스스한 달은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진부함 속에서도 달의 이미지는 여전히 많이 사용된다. 잡으려 하면 도망가는 욕망, 그리고 그것을 잡았을 때 빠르게 다른 대상으로 전이되어야 하는 욕망은 달의 이미지와 많은 부분 닮아있다. 암스트롱이 달을 밟았다곤 하지만 달은 여전히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통해 상상하고, 그곳에 닿길 욕망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들이 암스트롱의 달나라 여행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달은 아직 잡히지 않는 욕망이어야 하기 때문에.


문라이트

MOONLIGHT (2016 / Barry Jenkins)


 “이미지에 선행하는 조건은 시각이다."라고 야누흐는 카프카에게 말했다. 그러자 카프카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어떤 것들을 사진 찍는 것은 그것들을 정신에서 몰아내기 위해서이다. 나의 이야기들은 눈을 감는 하나의 방식이다.”(밝은 방, 롤랑 바르트)

 내가 영화와 감응하는 방식은 사후적이다. 나는 영화를 보며 무릎을 치며 감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내가 깊게 감응한 영화들은 사후에 그 이미지와 텍스트들이 점점 더 크게 다가온다. 카프카와 바르트가 말한 ‘눈 감기’는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 본 영화 ‘문라이트’는 이런 사후 그리고 침묵을 통해 이 글에 영향을 줬다. “달빛 아래서 흑인 소년은 파랗게 보인다.”라는 대사와 이미지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나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다 문득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 ‘존재했던’ 유령을 바라보는 구경꾼, 모두 달빛 아래 선 소년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렇다면 나에게 푼쿠툼을 준 달빛(이미지)은 나를 어떻게 감응-변화시켰는지가 궁금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쓰는 글에선 ‘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배제된 글이 더 객관성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글쓰기 과정에서 모든 것은 결국 나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우연의 연속으로 만들어진 수석을 발견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보고 생각한 것을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나’를 배제할게 아니라 더 ‘나’를 바라봐야 했다. 달빛(영화, 이미지, 텍스트)을 받은 나의 모습이 어떻게 감응하는지, 그리고 발현하는지 더 세심하게 바라봤어야 했다. 나는 달빛을 받은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기 위해 이 글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 나의 모습과 달이 닮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태양의 빛을 받아 자신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달처럼, 푼쿠툼을 주는 이미지를 받아 나-나의 생각을 발현하고 싶다. 결국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달빛 아래 파랗게 물든 또 다른 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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