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영화. <소리도 없이>
소리도 없이 Voice of Silence , 2020 제작
한국 | 범죄 외 | 2020.10.15 개봉 | 15세이상 관람가 | 99분
감독 홍의정
신은, 구약을 보건대 한 처음에 말씀으로 존재했고, 신약을 보건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계셨다. 이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복음, 1장 14절)라는, 요한복음 속 문장을 통해 알 수 있다. 요한의 말대로라면, 신의 본래적인 존재양식은 소리이다. 그 "말씀"의 전승양식은 문자지만 존재양식은 소리인 것이다. 그런데 완전한 존재로서의 신의 소리는 신의 정신 혹은 뜻인바, 곧 로고스(logos)이다. 따라서 인간을 ‘신의 모상(이마고 데이, Imago-Dei)’으로 바라보는 기독교적 인간관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신의 뜻, 즉 신의 소리를 실현하는 것이다.
<소리도 없이>에서 이 로고스는, 그리고 이 이마고 데이는, 창복을 통해 존재를 알려온다. 창복(유재명 분)은 태인(유아인 분)과 주로 달걀을 팔면서 생활하지만 가끔 범죄조직의 하청을 받아서 시신 처리 일로 돈을 벌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런데 창복은 시신을 묻기 전, 성경에 손을 얹고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태인에게 언제나 겸손하고 성실히 살라는 가르침을 전하며 기도 테이프를 밤마다 들을 것을 권한다. 창복은 죽은 이와 태인에게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 즉 로고스를 전하는 사도이며 이마고 데이를 실현하려는 인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창복은 ‘어떤’ 이마고 데이인가? 로고스는 완전한 하나의 존재이지만, 이마고 데이는 완전한 존재를 ‘닮은’ 존재로 다양한 모습을 취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 창복을 두고 단적으로 이마고 데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며 ‘어떤’ 이마고 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복은 땀 흘려 일하는 것을 자신의 성소(聖所)로 삼는 인물로, 노동을 구원의 매개로 삼은 신교도들을 닮으려고 하는 이마고 데이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 창복과 태인이 시신 처리 업무를 하기 전, 두 남자가 작업복으로 갈아입는 장면에는 두 남자 뒤로, “성실한 땀방울, 내일의 미소”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 문구대로, 창복은 달걀을 팔고 범죄조직에게 하청 받은 일을 하느라 쉴 틈이 없다. 그는 성실히 땀 흘려 일하며 지상국에서는 부를 쌓고 천상국에서는 신의 구원에 이르기를 소망한다.
물론 그에게 형사상 방조나 유기의 책임이 따를 수는 있겠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성실하게 노동하고 기도하는 삶이다. 혹여, 그가 방조나 유기행위를 인지하고 그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는 성실하게 노동하고 기도하는 삶으로 죄책감을 덮어버린다. 이러한 창복의 삶을 보건대, 그는 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삶을 살지만 삶으로서 신을 죽이는 인물이기도 하다. 노동할수록 이마고 데이를 실현하는 일로부터 멀어지며 기도할수록 부조리와 모순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마주하게 되는 일상을 반복해 나가면서 창복은, 죄의 반복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삶을 조금이나마 거룩하게 만들어주는 낡은 성경을 붙드는 것이 아닐까. 성경에 적힌 로고스를 상기함으로써 죄의 사슬을 언젠가 끊어야하는 과제를 환기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죄의 사슬 속에 있는 자신을 언젠가 구해야 하는 창복의 과제는, 영원히 연기되어 버린다. 어느 날 창복은 범죄 조직의 일에 연루되어 어린 여자 아이를 유괴한 셈이 되어 버리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또, 그때부터 그는 상황의 힘에 완전히 압도당하게 된다. 이제 그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으로서의 로고스도, 자신의 로고스도 없다. 사고의 힘은 무력해지고 상황에 의해 덮쳐진 그는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힌다. 공포에 사로잡힌 그는 주변 상황을 모두 위협적인 요소로 느끼고 헛된 것에 좇기기까지 하다가 넘어져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하나님,”이라고 울며 고백한다. 다시 일어나 도망을 하려던 그는 발을 접질려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쳐 죽게 된다. 공포스러운 상황이 그를 덮치자 그는, 이전처럼 차분하게 성경말씀을 떠올릴 수도, 엄숙하게 기도할 수도 없었다. 상황의 힘이 로고스의 힘을 이긴 것이다. 즉 그의 삶에서 상황의 힘이 소리의 힘을 이긴 것이다.
그가 죽기까지 그의 뒤로 “꿈의 투어”와 “편안히 하늘로”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압도되어 죽기까지의, 그의 삶이, 꼭 꿈만 같다’,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쯤 되면 창복의 죽음을 두고 우리는, 방조와 유기에 대한 죗값이라고 하기보다, 그가 “편안히 하늘로” 갔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고 보면, 창복은 죄를 적당히 짓고 자기 삶도 적당히 통제하면서, 신의 말소리로서의 로고스에 희망을 두고 살았었지만, 자기 삶을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자 상황에 휘둘리면서 로고스를 상실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리도 없이>는 소리도 없이 나를 덮친 상황의 힘에 휘둘리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상황의 힘에 압도되어 로고스가 아닌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소리도 없이>는 도구적 이성의 발달과 효율성의 추구로 기계적이고 획일화된 소리만 만연한 상황, 그래서 인간성을 담은 소리가 없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창복을 죽음으로 내몰게 한 상황을 구성한 사람들의 소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에서 창복과 유괴한 아이를 팔아넘기려는 정한과 일규의 목소리와 말투는 닮았다. 세 사람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으며 기계적이고 사무적이며 친절하기까지 하다. 세 사람 간에는 일의 종류상 언쟁이 일어날 것만 같지만 웬만해선 소모적인 언쟁이 일어나지 않으며 중요한 일이라고는 효율적인 일의 처리뿐이다. 그들은 하는 일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서로를 친절한 말투와 목소리로 대한다.
그들에게 예의와 친절한 소리는 인간성을 담는 그릇이 아니다. 그 소리는, 그들에게는 가장 안전한 생업의 도구이며, 마찬가지로 유괴당한 후 태인에게 맡겨진 초희라는 아이에게는 살아남는 방식이다. 초희는 두려울만한 상황에서도 평정한 상태로 태인과 그의 동생 문주에게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말하고 행동한다. 그것이 초희에게도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초희는 태인의 집에 오게 된 다음 날, 태인의 동생 문주에게 “문주는 착하지? 문주 오빠... 착해?”라고 묻는데, 초희는 착한 사람에게 통하는 방법이며 가장 안전한 방법인, 친절을 베풀기로 한다. 어른들처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을 때까지.
위와 같은 맥락에서 태인은, 로고스로서의 소리와 인간성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소리를 상실한 이 시대의 사람들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닐까. 그리고 태인은 침묵함으로써 이 세상을 견디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말이란 생각의 표현이며 상대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때, 태인에게는 달리 표현할 것도 저항할 것도 없으며 그저 이 부조리한 세상을 견디는 것만이 미덕이 아닐까. “우리 안에 영원히 간직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왜 우리는 반항하는가?”(알베르 카뮈, 「반항하는 인간」에서) 즉, 이 영화는 삶의 부조리와 부정의를 ‘소리도 없이’ 폭로하고 있다.
한편, 영화의 마지막에선, 태인은, 소리도 없이 사건에 연루된 창복처럼, 초희의 폭로에 의해 불시에 유괴범이 되고, 두려움에 떨며 도망하다 소리도 없이 죽은 창복처럼, 무서운 마음에 방향도 없이 도망하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혼란한 마음으로 울며 도망하던 태인이 어두운 터널을 뚫고 빛을 향해 나오는 찰나, 영화는 끝난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태인의 얼굴에서 엿볼 수 있는 표정 변화를 보면, 짧은 터널을 나오는 찰나에 태인이 꼭 진실을 깨달은 것만 같다. 믿지 못할 관계와 부조리한 삶과 부정의한 사회라는 진실을 깨달은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