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앙 살몽,『스토리텔링』, 류은영 옮김, 현실문화, 2010, 3장
『스토리텔링』, 「3장. 감성의 수사학, 신 '경제픽션」
1장과 2장에서 신경제가 소비자의 생활양식과 경영기획방식을 허구화하는 현상에 대해 살펴보았다면, 3장에서는 세계화와 신경제가 노동자의 생활양식과 노동방식을 허구화하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인도에 있는 미국기업의 콜센터 직원들은 매일 밤 미국소비자들에게 응대하기 위해 미국문화에 동화되어야 한다. 실제로 그들은 미국인들처럼 발음하기 위해 “‘억양 중화 수업’이라는 발음 연수”(98쪽)를 받으면서 모국의 억양을 완전히 버려야 하며 미국인처럼 생각하고 말하기 위해 미국드라마를 보면서 미국문화를 흡수한다. 즉, 세계화가 야기한 신경제는 소비자뿐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정신마저 포맷시킨다.
신경제는 위와 같이 대외적인 수준뿐만 아니라 대내적인 수준에서도 허구를 생산하는데, 이를테면 기업은 기업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노동자가 노사관계를 허구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실제로 기업은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가 위계적이고 일방적이 아니라 수평적이고 상호적이며 사원들의 관계는 경쟁적이 아니라 협력적이라는 허구를 생산한다. 이러한 허구 안에서 사원들은 주체적이고 개방적이며 협력적인 자세로 노동에 참여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정리하면, 위에서는 선진국의 글로벌기업이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의 하도급기업의 노동자들로 하여금 의식이 서구화되도록 하여 허구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게 하는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허구가 생산되고 있다면, 여기에서는 기업들이 사원들로 하여금 노사관계를 수평적이고 협력적으로 의식하도록 허구적 스토리를 생산하고 그 스토리에 사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물이 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허구가 생산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변화의 양상을 보건대, 신경제가 생산한 것은 신 ‘경제 픽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신 ‘경제 픽션’에서 권위와 힘의 주체는 바로 이야기가 될 것이며, 비즈니스는 더 이상 경제행위의 장(張)이 아니라 창조 행위의 장(場)이 될 것이다. 서사야말로 사원 각자의 자세를 고취하고 유용한 능력을 기르고 발휘하게 하는 동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이성의 규율이 아니라 감정의 매료가 된다. 이야기에 매료되는 데에 작용하는 것은 이성의 추론이 아니라 감정의 끌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성의 당위적 명령이나 이성의 논리적 추론 역시 중요하다. 이 책 역시 “1990년대 바야흐로 신자본주의의 수사학을 구성하는 세 요소”(111쪽)를 들고 있으므로 신경제에서 감정의 작용이 중요해졌다는 것이지 나머지 두 요소가 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는 말을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에 대해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의 3원칙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그것은 연설자의 성품인 에토스(ethos), 연설자가 연설을 하면서 고려하고 반응해야 하는 청중의 감정(pathos), 연설자의 논리적 변증 능력인 로고스(logos)인데, 이 책은 이로써 신경제의 경영을 유비적으로 설명한다. “첫 번째 요소(원한다면, 에토스)는 지속적인 변화에의 명령 형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두 번째(파토스)는 감성적 자아로서 자본주의의 새로운 ‘주체(소비자, 샐러리맨 혹은 경영자) 형성에 따른 (주체의) 조종·상품화 과정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감성경영(emotional management)과 관련된다. 세 번째(로고스)는 언어의 역할 및 특히 감성적 자아의 관리를 위한 이야기의 활용을 강조한다.”(111쪽) “산업자본주의는 감정을 상품으로 변화시키면서까지 정서를 가로채는 ‘감정자본주의’로 변모하는 중일 것이다.”(107쪽)
자본주의의 양상이 변하고 있다면, 리더의 자질도 변해야 할 것이다. 리더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생각을 개진하는 사람이 아니라 청중으로 하여금 정서적이고 수사적인 방식으로 이야기에 동감하고 참여하게 할 수 있게 하고 나아가 청중이 이야기의 인물이 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스토리텔러가 리더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현상은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스토리텔러가 기업의 리더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기업의 리더들을 교육하는, 리더의 리더가 되어 가고 있다. “경영은 (···) 여러 혁명을 겪었다. 하지만 빌 게이츠, 필립 나이트 혹은 리처드 브랜슨이 그 상징적 발기인인 시기상의 마지막 혁명은 기술자도 금융가도 아닌 바로 소설가라는 뜻밖의 지도자를 내세운다. 스토리텔링 구루들이 권장한 경영혁명은 앞서 살펴본 대로 도요타가 아니라 톨스토이를 자청한다.”(110쪽)
한편, 현실적 이유들은 허구를 생산하는 것을 더욱 정당화한다. 왜냐하면 불확실한 세상에서 기업은 이러한 세상 탓에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이며 공상적인 정서 상태에 있는 소비자들과 불안한 노동자들을 정서적이고 감각적으로 자극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부상하는 신형 기업들은 불확실해진 환경에 직면해 변화를 수용하겠다는 각오로, 가능성을 향한 전향적인 방향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가히 공상적이라 할 만한 정신상태가 만연하게 되는바, 이는 그만큼 허구세계 고유의 허세, 불신의 중지, 그야말로 돈 드릴로가 “경이로운 변화의 극치를 느낀다.”라는 말로 멋지게 설명하는 신경제의 완전한 이상형을 전제로 한 것이다.”(111~112쪽) “주식의 불안정, 오프쇼링의 위협으로 하여 별안간 생겨난 기업에, 어떤 직업적 전망도 없는 기업에, 사실 “경이로운 변화의 극치를 느끼는” 이보다 자연스러운 일이 어딨겠는가? 경이로운 서사를 약속하는 이보다 마음을 끌 일이 뭐 있겠는가?”(112쪽)
이제, 이렇게 불확정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세계에서 후기신형기업의 노동자들에게 서사구조의 기본범주인 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경험되는지, 그리고 경영자는 어떤 서사구조를 마련해야 할지를 알아볼 차례이다.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로서의 소비자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인물로서의 노동자가 어떻게 느끼고 경험하는지를 분석할 때 그 인물들이 자기 캐릭터를 능동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서사를 구성하여 “소설에 빠져들 듯”(116쪽) 일하게 하고 “공동의 서사”(116쪽)에 순응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전엔 일정한 공간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일을 했으므로 안정적이고 단일한 노동환경, 즉 안정적이고 단일한 서사구조가 마련되었지만, 지금은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서사구조로서의 노동환경이 해체되고 있다. 이를 추동한 것은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현실, 가령 연속적으로 경력을 형성할 수 없다는 직업적 불안 등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유목민이 되고, 노동시장은 유목민-노동자들의 초원이 되며, 노마드(nomad)가 생활과 노동의 방식의 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날 노동자들은 프로젝트를 위해 기업과 국가를 넘나들며 협력했다가 해체한다. 따라서 오늘날 스토텔텔링 경영은 인물들이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모든 변화에 이끌리고 참여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스토리텔링은 변화의 관념의 가장 훌륭한 매개체, 어떤 ‘변종’ 조직의 담화양식으로 드러난다. 이후로 경영은 간부와 사원들에게 프랑스 소설가이자 시인인 장 주네(Jean Junet)가 전혀 다른 문맥에서 거론했던 한 자세, 즉 (아이를 붙잡거나 집안일을 마치기 위해 언제라도 일어설 준비가 된, 무릎을 꿇은 채 웅크리고 앉은 인디언들의 제스처와 관련된) ‘급출발 자세’를 고취하려 들게 된다. 이 자세는 돈 드릴로의 표현을 빌려 다시 말하자면, 지속적으로 ‘뭔가의 극치’를 느끼도록 되어 있는, 경이로운 변화를 위해 대기하는 특수한 정신 조치다.”(116~1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