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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 Feb 01. 2023

서평.「뫼비우스의 띠」-『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1978)

책: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성과 힘, 2022

그림: 오원배, Untitled 1998 Mixed media on canvas ,700 ×463 inches

 

 Ⅰ. 조세희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대한 전체적 소개

  

  조세희(1942. 8. 20.~2022. 12. 25.)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세 가지 측면에서 소개할 수 있다. 우선, 이 소설집은 주제적 측면에서 소개될 수 있다. 조세희는 소설집 전체에서 세계의 대립을 양면적으로 제시한다. 한편으로는 세계의 대립 자체를 현상적으로 제시하되 그 대립 극복의 가능성을 변증법적으로 제시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대립을 계급 갈등의 양상으로 제시한다. 실제로 작품 속 인물들은 사용자와 노동자 혹은 상층과 하층으로 구분되며, 사용자와 상층은 언제나 노동자와 하층보다 스스로를 우월한 집단으로 인식하며 하등한 집단인 노동자와 하층의 노동을 착취하고 배제하고 차별한다. 작가는 이러한 노동 착취와 인간 존엄의 상실과 인간 소외로부터 겪는 깊은 상처를 직시하고 담담히 전달하면서도 통합과 합일을 소망하는 한편, 소망하는 바가 이야기의 끝이 되게 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빈부 격차와 계급 갈등을 통해 사회학적인 차원에서 사회현상과 문제만을 전달할 뿐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인간의 존엄을 상실하고 동물과 같이 약육강식의 원칙을 토대로 사회를 운영하고 있음을 고발할 뿐이다.


  다음으로, 이 소설집은 효과 측면에서 소개될 수 있다. 이는 위의 주제적 측면으로부터 심화시킬 수 있다. 독자는 이 소설을 통해 산업화 시대 노동자 삶의 현실을 체험할 수 있게 되며, 오늘날 물리적인 조건은 바뀌었지만, 당시 노동자가 겪었던 비극적 소외는 지금도 여전하다는 점을 의식하게 된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기로부터 약 35년이 흐른 지금, 노동의 효율성과 생산량은 증대되었고 전체의 부(富) 역시 축적되었지만, 경제적 양극화는 여전하다는 점에서, 풍요로운 사회 이면에 숨은 빈곤과 소외는 여전히 짙게 경험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빈곤과 소외의 양상이 작가의 소설 속 상황과 똑같을 수는 없지만 인간이 도구화되고 사물로 전락한 시대 혹은 집단에서 발견되는 본질적인 문제는 여전하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집은 형식적 측면에서 소개될 수 있다. 작가는 짧은 문장을 통해 인물들의 행위와 생각을 묘사한다. 이러한 단문의 형식은 인물들이 놓인 물리적·심리적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마치 도미에(Honoré Victorin Daumier, 1808~1879)의 <삼등열차>와 같이, 사실을 재현하는 회화 작품을 보는 것 같은 효과를 일으킨다. 또한, 단문이지만 수를 놓듯 써 내려간 작가의 문장은 짧은 시간 동안 사물과 상황을 포착하여 그려낸 크로키 작품이 감상자에게 주는 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작가의 짧은 문장은 꼭 필요한 선으로 대상을 모방한 크로키처럼, 꼭 필요한 표현을 통해 모방 대상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시간과 공간의 조건을 생생히 그리고 미학적으로 체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대립과 화해의 변증법적 운동이 작용하는 세계 이해를 토대로, 대립의 운동 속에 있는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한다. 특히, 산업화 시대의 인간 소외를 통해 그 대립의 비극적 양상을 보여주되, 단문의 형식을 통해 효율적이고 미학적으로 보여준다.           

 


  Ⅱ. 「뫼비우스의 띠」에 관한 해석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속 「뫼비우스의 띠」는 앞서 언급한 내용 중, 첫 번째로 소개한 차원, 즉 주제적 차원을 심화하여 해석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이 소설집을 통해 세계의 변증법적 운동을 토대로 대립의 단계에 주목하되 그것의 양상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사용자 혹은 자본가의 의식을 고발한다. 세계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대립과 조화, 화해 혹은 극복의 과정을 통해 운동하고 있는데, 작가가 보기에 우리 사회는 질서를 위한 투쟁 혹은 자기 발견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한 폭력적 투쟁에 빠져 있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문제적 상황을 「뫼비우스의 띠」를 통해 우화적으로 알려주고 교육하려고 했던 것이다. 즉, 「뫼비우스의 띠」는 타인과 공동체를 통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공동체의 역사적 지평 혹은 인간 조건의 지평 위에서 자신을 근본적이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소설은, 교실을 배경으로 시작되며 사회에서 제 몫을 하기 시작할 나이에 가까운 학생들에게 마치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처럼 문답하는 과정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때, 작가는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도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회적·경제적 약자를 대변하는 ‘굴뚝 청소를 하는 아동들’과 ‘꼽추’와 ‘앉은뱅이’를 등장시켜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비극적 대립과 투쟁을 고발하고, 이로써 우리 사회가 변증법적 운동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지를 직시하게 한다. 먼저, 소설 속 ‘수학 담당 교사’는 종강 수업에서 ‘제군’에게 ‘아동 굴뚝 청소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단 내가 묻는 형식을 취하겠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했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또 한 아이는 그을음을 전혀 묻히지 않은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다. 제군은 어느 쪽의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13쪽)  

  이에 대해 학생들은 얼굴이 더러워진 아이가 얼굴을 씻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수학 교사’는 청소부 아동들은 서로의 얼굴을 거울삼아 판단하게 되므로 오히려 깨끗한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며, 얼굴이 더러워진 아이가 얼굴을 씻지 않게 될 것이라고 답한다. 교사의 이러한 답을 들은 학생들은 감탄한다.      


한 아이는 깨끗한 얼굴, 한 아이는 더러운 얼굴을 하고 굴뚝에서 내려왔다. 얼굴이 더러운 아이는 깨끗한 얼굴의 아이를 보고 자기도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반대로 깨끗한 얼굴을 한 아이는 상대방의 더러운 얼굴을 보고 자기도 더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동들의 위와 같은 의식 단계는, 변증법적 자기 인식의 첫 번째 단계로서, 타인에 비추어 자신을 대상화하는 단계이다. 자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아는 타인을 통해 자신을 대상화하게 되고, 그것에 비추어 비로소 자신을 객관화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얼굴이 깨끗한 아동이 자기 친구 얼굴을 보고 얼굴을 씻게 되는 것이다. 즉, 청소부 아동들은 친구를 통해 자기 모습을 의식하게는 되었지만, 자기 인식에 관해 아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수학 교사’는 ‘제군’에게 위의 질문을 다시 던진다. 그러자, ‘제군’은 교사에게 이미 들은 깨달음을 토대로, 깨끗한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며, 얼굴이 더러워진 아이가 씻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다. 이에 교사는 학생들의 답이 여전히 틀렸다고 말하며, 이번에는 다른 답을 말한다. 교사에 따르면 두 아동은 모두 얼굴을 씻어야 한다. 두 아동이 동일한 조건에 있었으므로, 그 결과가 다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두 아이는 함께 똑같은 굴뚝을 청소했다. 따라서 한 아이의 얼굴이 깨끗한데 다른 한 아이의 얼굴은 더럽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15쪽)     

  아동들의 위와 같은 의식 단계는, 변증법적 자기 인식의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로서, 타인과 나를 넘어 역사적 지평에 비추어 자신을 대상화하고 그 깨달음을 토대로 실천하는 단계이다. 두 아동 노동자들이 굴뚝에서 청소했던 공통의 시간이라는 지평에 비추어 자기를 인식했다면, 두 아동 모두 얼굴을 씻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교사는 아동들이 그러한 선택을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하므로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즉, 제3자의 정신에 비추었을 때, 아동 노동자들이 마땅히 선택해야 하는 행동인 것이다. ‘함께 씻어야 한다’는 것은, 아동 노동자들이 아동 노동자라는 집단적 정체성을 각성하여 서로가 다르지 않음을 인지하고 연대하여 자신들이 함께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실천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을 토대로 했을 때 자기 인식을 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 삶에 대한 추상화, 대상화, 혹은 객관화가 된다. 자기 존재와 삶의 조건을 객관적으로 추상할 수 있을 때, 그것에 비추어 생활 조건을 개량하고 인간성을 실현할 가능성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학 교사’는 입시에 도움이 되는 도구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이 아니라 수학적 지식을 매개로 진리를 전하고자 했던 것이며, 그것이 바로 ‘뫼비우스의 띠’인 것이다.       


면에는 안과 겉이 있다. 예를 들자. 종이는 앞뒤 양면을 갖고 지구는 내부와 외부를 갖는다. 평면인 종이를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오려서 그 양끝을 맞붙이면 역시 안과 겉 양면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한번 꼬아 양끝을 붙이면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즉 한쪽 면만 갖는 곡면이 된다. 이것이 제군이 교과서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이다. 여기서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곡면을 생각해 보자.(15쪽)     

  작가는 이후 ‘꼽추’와 ‘앉은뱅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둘은 도시 개발 과정에서 부당하게 철거민 신세가 된 사람들인데, 자신들의 터전을 싸게 매입하여 이득을 챙기고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쫓아내려는 자본가들을 향해 연대하여 자기의 정당한 몫을 챙긴다.

  이후, ‘꼽추’는 노동의 가치와 자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은 깊은 마음을 충족하기 위해, 강냉이 장사를 함께 하자는 ‘앉은뱅이’의 제안을 거절한다. ‘꼽추’에게 완전하고 거룩한 삶은 자기 노동을 통해 사는 것이며 자기 쓸모를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꼽추’는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완전한 사람은 얼마 없어. 그는 완전한 사람야. 죽을 힘을 다해 일하고 그 무서운 대가로 먹고 살아. 그가 파는 기생충약은 가짜가 아냐, 그는 자기 일을 훌륭히 도와줄 수 있는 내 몸의 특징을 인정해줄 거야.(28쪽)     


  Ⅲ. 「뫼비우스의 띠」에 관한 감상      


  「뫼비우스의 띠」 속 이야기에는 누구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다. ‘수학 교사’, ‘제군’, ‘아동 노동자’, ‘꼽추’, ‘앉은뱅이’와 같이 인물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만 표기될 뿐이다. 나는 이를 통해 작가가 전하려고 한 것이 다음의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우선, 작가는 독자가 사회적·역사적 지평을 토대로 자기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것을 토대로 서로의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고 연대하여, 합일의 정신을 발휘하기를, 기도(企圖)한 것이 아닐까. 나아가 그러한 자기 이해 방식이 곧 세계와 진리 이해의 방식으로 확장될 수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방식으로 정정진(正精進)해야 함을 설파한 것이 아닐까.     


끝으로 내부와 외부가 따로 없는 입체는 없는지 생각해보자. 내부와 외부를 경계지을 수 없는 입체, 즉 뫼비우스의 입체를 상상해보라. 우주는 무한하고 끝이 없어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을 것 같다. 간단한 뫼비우스의 띠에 많은 진리가 숨어있는 것이다. (중략)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중략)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제군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 사물을 옳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29쪽)     

  그렇다면, 공부의 목적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식은 자기와 세계를 이해하고 진리가 실현될 수 있게 하는 데에 봉사해야지, 사익만을 추구하는 데에 실용적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굴뚝 청소 아동 노동자’들이 서로의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여 함께 씻어야 하며 ‘꼽추’와 ‘앉은뱅이’가 연대하여 서로의 정당한 몫을 되찾아야 하듯이, ‘제군’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에 비추어 현실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추상화함으로써 사회를 진단하고 연대하여 대안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언제나 자유와 평등과 인권이며, 모든 교과 지식은 이에 대한 알레고리가 아닌가. 이에 비추어 현실의 문제를 추상화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변증법적 세계 운동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야말로 작가가 ‘수학 교사’를 통해 독자인 ‘제군’에게 전하는 교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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