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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 Mar 03. 2023

방송비평. 애환의 블루스에서 희망의 블루스로

2022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 책표지이미지출처: yes24


* 방송문화진흥회에서 주최하는 시민의 비평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 글은 수상 작품집(방송문화진흥회 엮음, 『애환의 블루스에서 희망의 블루스로』, 2022, 한울엠플러스) 13~22쪽(「최우수상: 애환의 블루스에서 희망의 블루스로」)에 실렸습니다.        


<우리들의 블루스>(tvn, 드라마, 20부작, 2022.4.9.~6.12.)

김규태(연출), 노희경(극본)  



  파제. ‘블루스로부터┃ <우리들의 블루스>는 파제(破題), 즉 제목의 뜻을 밝힐 때 드라마의 정체도 열어 밝혀지기 시작한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음악 장르인 ‘블루스(blues)’의 정신과 형식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블루스의 특성을 토대로 드라마의 정신과 형식과 정서를 유추하고, 드라마를 해석하고 평가해 보려고 한다.       



  어원. ‘블루스와 <우리들의 블루스> 블루스’는 노예해방 후 미국으로 넘어온 남부 흑인들의 음악이다. 블루스의 어원에 관한 설 중 하나는 블루스가 장례 때 슬픔을 표현하는 의식으로 옷을 ‘푸른색’으로 물들여 입던 그들의 관습에 기인한다는 설이다. 다른 설은 불안감 혹은 우울감을 뜻하는 ‘블루 데빌스(Blue Devils)’라는 말에서 온 것이라는 설이다. 특히 초기 블루스(country blues)에는 백인 경찰들의 폭압과 같은 사회적 부조리나 실연과 같은 개인적 고통이 드러났는데, 이로 인한 ‘슬픔’과 ‘절망’, 그리고 이러한 때에도 잃지 않는 ‘유머’가 블루스에 흘렀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제목에는 블루스 어원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남부의 ‘푸릉’ 사람들은 ‘푸른색’ 바다에 둘러싸여 쉼 없이 노동한다. ‘옥동(김혜자)’은 아들 ‘동석’을 굶기지 않으려고 첩이 되어 종살이하고, ‘춘희(고두심)’는 아들 ‘만수(김정환)’ 가족을 위해 일하고, ‘영옥(한지민)’은 장애인 언니 ‘영희(정은혜)’를 위해 일하고, ‘인권(박지환)’과 ‘호식(최영준)’은 각각 아들 ‘현(배현성)’과 딸 ‘영주(노윤서)’를 육지 대학에 보내려고 일하고, ‘한수(차승원)’는 딸을 프로골퍼로 성공시키려고 일하고, ‘은희(이정은)’ 역시 부모님과 남동생 때문에 일한다. 그런데 ‘푸른색’ 바다는 마을 사람들을 살 수 있게 하는 한편,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므로 그들에게 ‘불안감’과 ‘우울감’을 느끼게도 하며, 섬 안에 갇혀 있다는 ‘절망감’을 느끼게도 한다. 이렇게 ‘푸른색’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슬픔’과 ‘절망’의 선율이 흐르며, 남부 흑인들의 블루스가 길거리와 시장과 술집에서 울려왔듯, ‘중앙시장’과 ‘영옥의 술집’에서 울려온다. 즉, 드라마의 제목에는 블루스의 두 가지 어원에 관한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다.       



  형식. ‘블루스와 <우리들의 블루스>┃ <우리들의 블루스>의 형식 역시 블루스의 형식과 관련해서 해석될 수 있다. 블루스에서 “노래의 절은 동일한 패턴을 따른다. 가수는 노래하면서 기타로 반주를 넣을 수 있는데 가끔씩 다른 화음이나 추가 비트를 첨가할 수 있다. 그래도 기본 패턴은 동일하게 유지된다. 그리고 가수도 가사 내용이나 자신의 개인적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 선율선을 바꿀 수 있다”(제레미 유드킨(Jeremy Yudkin), 『서양음악의 이해』, 민은기 외 옮김(시그마프레스, 2013), 270쪽). “블루스 형식은 ······ 주고받기 형식(Call and Response), 블루스 스케일을 이용한 여러 코드 진행, 두 박자 또는 네 박자의 12마디로 진행하는 블루스가 일반적이며 장조와 단조가 뚜렷하지 않다”(위키백과). <우리들의 블루스>는 블루스의 형식처럼, ‘동석’과 ‘영옥’의 에피소드가 저음부에서 연주되고, 다른 인물들의 에피소드가 그 이야기를 변형시키며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연주하면서 때로는 장조의 분위기를, 때로는 단조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렇게 드라마의 단편들은 블루스처럼 서로 화답하고 있으며, 그 화답송의 선율은 때로는 밝고 때로는 어둡다.

  이렇게 블루스의 형식은 엄격하면서도 유연하다. “블루스 창법의 핵심은 음정의 모호하고 미묘함, 장식의 억제와 일부러 집어넣는 계산된 틀린 음, 그리고 리듬의 자유로운 구사다. 이런 음악적 특징 덕분에 블루스는 딱딱하고 단순한 백그라운드에 대비되는 매우 유연하고 개성적인 보컬 스타일을 얻을 수 있었다”(제레미 유드킨(Jeremy Yudkin), 『서양음악의 이해』, 270쪽). 드라마 리뷰 영상 인터뷰에서 작가는 배우들에게 새로운 연기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배우 김혜자는 이 드라마에서 해본 적 없는 연기를 했다고 말했다. 배우 이병헌을 비롯한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그들이 출연한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없는 것인 경우가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드라마는 각 캐릭터의 다양한 블루스로 이루어진 하나의 블루스인데, 그 블루스란 ‘푸릉’에서 형성된 삶의 형식이자 정신이자 정서이므로, 배우들은 사건이나 행동을 모방하기보다는, 형식과 정신이자 정서로서의 삶을 모방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개성적인 보컬 스타일’로 연기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블루스는 형식이고, 동시에 사운드며, 또 동시에 정신이다”(제레미 유드킨(Jeremy Yudkin), 『서양음악의 이해』, 270쪽)라고 정의되듯, 그것을 차용한 <우리들의 블루스> 역시 형식이고, 동시에 서사이며, 또 동시에 정신이다.     



  옛것. ‘고향 드라마┃ 그런데 작가는 왜, <전원일기>(MBC, 드라마, 1980.10.21~2002.12.29, 방영, 1088부작.)나 <대추나무 사랑걸렸네>(KBS1, 드라마, 1990.9.9~2007.10.10, 방영, 852부작.)와 같은 고향 드라마나 농촌 드라마가 떠오를 만한 이야기를, 새삼 새로운 방식으로 들려주는 것일까. 왜 <전원일기> 속 ‘복길(김지영)’과 ‘영남(남성진)’이 어른이 된 후의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일까. 이 두 드라마는 급격한 산업화를 이룬 한국 사회에서 소외되어 가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다. 한편, <우리들의 블루스>는, 이 두 드라마가 담고 있는 이야기 위에, ‘푸릉’과 같은 곳에서 공동체적 삶을 살다가 1980년대 후반이나 1990년대 초반에 도시로 온 ‘한수’나 ‘미란’처럼 지금의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나이의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의 경쟁 체제 아래서 인간의 도구화와 기능화와 관계의 단절로 인해 경험하는 소외의 이야기를 얹은 드라마다. 그들에겐 ‘고향의 맛’(제일제당 다시다의 광고문구)이 새삼 그립다. <전원일기>가 종영한 지 20여 년이 지나 재방송되고, 3040세대를 비롯한 다양한 세대가 이 드라마를 많이 시청하는 현상, 그리고 이 드라마에 대한 감상문이나 이 현상을 분석한 칼럼들이 많이 생산되는 현상은, 우리가 공동체의 정(情)과 연대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성을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드라마 제작발표회에서 한 기자가 드라마 배경으로 제주를 선택한 이유를 작가에게 묻자, 작가는 이웃끼리 모두 알고 관여하며 살아가는 제주 사람들의 삶에서 한국의 전통적 정서를 발견했으며 그러한 점에서 한국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그러고 보면, 기존의 고향 드라마가 시청자에게 상기시키는 정서 역시 관계의 촘촘한 그물망 속에서 서로의 삶에 관여하는 한국적 정서였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우리 마음의 이러한 본향(本鄕)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그리움을 <우리들의 블루스>는 해녀들의 팔에 새겨진 ‘일심(一心)’이라는 글자로 환기하는 한편, 그 정신을 선(線)과 돌(石)과 물(水)로 현현한다. 세 가지 요소의 물성은, 영화 <기생충>(2019, 봉준호 감독)과 대조함으로써 그 알레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오늘날 경제적 양극화와 고착화를 잘 드러내는 소재는 ‘선(線)’과 ‘돌(石)’과 ‘물(水)’이다. 우선, ‘동익(이선균)’은 운전기사인 ‘기택(송강호)’의 말이나 냄새를 두고 “선을 넘는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동익’의 의식에 사람 간 구별이 있음을 함축한다. 또, ‘민혁(박서준)’이 할아버지에게 받아 ‘기우(최우식)’ 가족에게 선물한 ‘수석’은 외부의 힘이 작용하면 낙하할 뿐 부동(不動)의 성질을 지닌 것으로, 오늘날 빈부격차의 고착화를 상징한다. 한편, 쏟아지는 ‘빗물’은 ‘동익’ 가족에게는 감상이나 놀이의 대상이 되지만, ‘기택’ 가족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즉, 부동(不動)의 성질을 지닌 ‘돌’과 유동(流動)의 성질을 지닌 ‘물’ 모두, 누군가에게는 무상성(無償性)에 관한 취미의 대상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 비참한 처지로 이동하게 만들며 ‘기택’ 가족이 해체되었던 것처럼 집단을 해체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선(線)과 돌(石)과 물(水)을 통해, <기생충>이 신자유주의 세계의 경쟁과 분열과 해체를 다루었다면, <우리들의 블루스>는 그 극복을 다룬다. ‘푸릉’ 사람들은 계층을 구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의 안녕을 묻고 개입함으로써 ‘선’을 넘는다. 그들은 누군가가 벽을 세우면 ‘일심(一心)’으로 그 벽을 허물고 개입한다. 또 ‘옥동’이 ‘춘희’ 아들 ‘만수’가 크게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돌에 소망을 담아 기도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에게 ‘돌’은 무상성(無償性)에 관한 취미의 대상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소망을 전이시키는 성물(聖物)이다. 그들은 ‘만수’나 ‘옥동’이 아팠을 때, 그리고 ‘은기(기소유)’가 100개의 달을 보며 기도하겠다고 했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푸릉’의 누군가가 고통에 처했을 때 그가 고통에서 구해지기를 ‘일심(一心)’으로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물’은 해녀들이 그러하듯 ‘일심(一心)’으로 움직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기에 공동체를 해체하게 하기보다는 통합하게 한다. 

  해녀들의 ‘일심(一心)’, 그리고 첫 번째 에피소드인 동창회와 마지막 에피소드인 푸릉리와 오산리의 체육대회에서의 ‘푸릉’ 사람들의 ‘일심(一心)’은, 서로를 구하며 살리는 마음이다. 마지막 회에서 다룬 체육대회의 마지막 장면은 높은 위치에서 촬영된 탓에, 운동장에 그려진 둥그런 원이 화면에서 전경(前景)의 이미지로 등장하는데, 이는 공동체의 원 밖으로 나가지 않는 그들 삶의 모습과 ‘일심(一心)’의 정신을 중심으로 원환적(圓環的)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은유하는 이미지다. 많은 사람이 고립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오늘날, ‘푸릉’ 사람들은 개인이 원자화되도록 두지 않는다. 그들은 어린이들, 임신한 청소년, 장애인, 남편과 자식을 잃고 모질게 일하는 노인, 첩살이하고 종살이하며 모진 삶을 살다가 암에 걸린 노인, 그 어머니 아래서 모진 삶을 함께 견딘 자식, 육지로 떠난 동료 모두를, ‘일심(一心)’으로 늘 염려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그들은 바로 이웃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전이시켜 노래하며, 위험하고 부조리한 사회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미덕, 즉 ‘일심(一心)’을 노래한다. 그래서 그들의 노래는 ‘우리들의’ 블루스인 것이다.      

  


  새것. ‘콤니버스’ 드라마 앞에서 말했듯, 이 드라마의 특성은 에피소드들이 독립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서로 화답하고 있다는 점이다. 드라마 리뷰 영상에서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작가는 새로운 형식을 시도해 보고자 했고 작가가 자료를 찾아본 한에서 이 드라마의 형식은 새롭다. 이전의 옴니버스 드라마들은 에피소드 중심으로 끝나지만, <우리들의 블루스>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저 에피소드에서는 조연이 된다. 따라서 시청자는 ‘동석’이 조연으로 출연하는 다른 에피소드를 보더라도 그의 서사를 궁금해 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한 탓에 작가는 ‘기대하는 바도 염려하는 바도, 시청자가 이 형식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작가가 시도한 새로운 형식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만일, 작가의 말대로 이전에 없던 형식이라면, 이 드라마의 장르는 새롭게 명명(命名)되어야 할 것이다. 이 드라마는 단편들을 모아 한 작품으로 만든 옴니버스(omnibus) 형식을 입고 있지만, 이 개념으로는 이 드라마 형식의 새로움을 드러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관여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콤무니코(commúnĭco)’의 앞 글자를 라틴어 ‘옴니버스(omnibus)’ 앞에 첨가해 ‘콤니버스(comnibus) 드라마’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이 드라마는 에피소드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의 이야기에 관여하며 응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영옥과 정준’ 편은 ‘영옥과 정준, 그리고 영희’ 편으로부터, ‘동석과 옥동’ 편은 ‘동석과 선아’ 편으로부터 비로소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왜 작가는 기존에 추구했던 옴니버스 형식에 주연과 조연이 바뀌면서 에피소드들끼리 서로 화답하거나 서로의 일에 모두가 정도를 달리하며 관여하게 하는 새로운 형식을 실험했던 것일까. ‘푸릉’ 사람들의 삶은 투명하고 상호적이며 밀접한 관계를 토대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이웃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무언가를 선택하고 행동하는 데에 관여한다. 이를 깊이 관찰했다면, 그들의 진실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주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형식을 취해야 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삶은 끊임없는 상호적 관여 속에서 형성된다. 삶은 내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기에, 다른 사람의 삶 속에 내가 있고 내 삶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 특히 그러한 상호 관여가 단절되지 않는 공동체에서는 특정인의 삶이 관심의 대상이 될 때가 있으며, 이는 순환한다. 

  제작발표회에서 한 기자가 배우 이병헌에게 이 드라마에서만 할 수 있었던 연기 경험을 묻자, 그는 캐릭터들의 사연이 복잡다단한 층을 형성해 나가는 느낌을 받았으며 또 각자가 맡은 캐릭터로 ‘살고’ 있는데 카메라만 돌면서 필요에 따라 특정 캐릭터를 클로즈업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이야말로, 삶의 핍진한 플롯이 아닐까. 실제로 ‘푸릉’과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가다 보면 관계의 그물망은 촘촘히 짜여가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특별한 일이 생김으로써 당분간 그 누군가가 공동체 시야의 중심에 들어올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당분간 그 공동체 서사의 주인공이 된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작가는 내용과 형식에서 삶의 핍진성을 드러내기 위해 골몰했던 것이며, 배우 이병헌의 고백은 드라마를 촬영하는 동안 했던 삶의 체험에 대한 고백이자 드라마가 성취한 리얼리티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평가형식과 내용의 조화그리고 탁월한 착상과 성취된 목적 그러고 보면, 이 드라마의 내용은 이 형식이 아니고서는 온전히 전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작가가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려고 ‘푸릉’ 이야기를 다룬 것인지, 아니면 ‘푸릉’ 이야기를 전하려고 새로운 형식을 고민한 것인지, 그 선후 관계가 궁금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이 내려지지 않는다. 이는 이 드라마가 내용과 형식의 완전한 조화를 실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이야기를 위해서는 이 형식이 아니면 안 되었으며, 이 형식을 위해서는 이 이야기가 아니면 안 되었다. 

  이렇게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이야기를 전하는 <우리들의 블루스>의 여운은, 내게 삶의 마디들을 떠올리게 한다. 서로의 슬픔과 절망에 응답하며 슬픔과 절망의 그물망을 함께 풀어내는 인물들은, 우리 역시 각자가 어딘가에 묶여 마음의 종살이를 하고 있지 않은지를, 물어온다. 내 마음의 최남단은 어디인지, 그 그물에는 누가 함께 얽혀 있는지, 다른 사람이 그물에 얽혀 종살이하고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과연 나는 무관한지를, 물어온다. 내 마음속 블루스를 듣다가 문득, 묻는다. 다른 사람의 블루스가 들려오는지, 나를 향한 울부짖음일 수 있는 그 블루스에 응답할 것인지를, 묻는다. ‘종우(최병모)’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는 ‘동석’을 보자 마음 안에 철철 흐르던 울음이 터진 ‘옥동’이 격렬하게 노래하는 단조 선율의 마디들, 죽음 앞에 있는 ‘옥동’에게 자신에게 미안함이 없느냐고 차마 목소리를 높이지는 못하고 ‘동석’이 조용히 따져 물으며 노래하는 단조 선율의 마디들, 체육대회에서 마을 사람들이 신나게 노래하는 장조 선율의 마디들은, 사람들과 함께 부르던 내 삶의 마디들을 떠올리게 한다. 

  위와 같은 감상은 드라마가 마지막 회에서 전한, ‘행복은 인간의 사명’이라는 메시지에도 함축되어 있다. 앞의 내용들을 고려하면, 아마도 이는, 그물망에 상처 입은 채 갇혀 있기보다는 나의 블루스를 부르고 다른 사람의 블루스를 들으며 관계의 그물망에서 살아갈 때 행복 역시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의 메시지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드라마의 제목을 다시 파제(破題)하면, <우리들의 블루스>는 ‘소외에 대한 애환의 블루스이며, 일심(一心)에 대한 희망의 블루스이자, 애환의 블루스에서 희망의 블루스로 넘어가는 초월적 블루스’, 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결국, 블루스의 형식과 정신에 ‘푸릉’의 삶을 담아냄으로써 잊힌 한국적 정서를 환기하되 그것을 새로운 옴니버스 형식으로 실험해 보겠다는 작가의 착상은 탁월했으며, 이를 통해 행복과 희망을 발견하게 하려 한 드라마의 목적 역시 성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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