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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 인간 취급과 역사 소외의 문제

2025 영화, <미키17> - 『미키7』과 <미키17>

by 이작가

Mickey 17

한국 | SF | 2025.02.28 개봉 | 15세이상 관람가 | 137분

감독 봉준호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7>을 읽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17>을 기다리면서,

감독이, "소설 속 미키가 처한 상황과 소설가가 택한 서사의 형식을 어떻게 영화화했을지",

그리고, "소설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봉준호 감독이, 현실의 문제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어떻게 드러냈는가"를 기대했다.




소설 속 미키 반스가 처한 상황


우선, "소설 속 미키 반스가 처한 상황"을 소개하자면, 역사가 미키 반스는 그 지식이 전혀 쓸모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 사회에서 구직은, 그에겐 소망 없는 활동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괜히 내기에 기웃거리다가 수중에 있던 돈마저 날리곤 더욱 곤궁한 상황에 처한다.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게 된 그는, 덜컥, 개척 행성 업무 중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익스펜더블"에 지원해버린다.


이미지 출처: 다음 포토


아무리, 상황이 그렇더라도, 기계도 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을 위해 반복적으로 죽고 재 프린트되는 업무를 선택한 것은,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과 자유, 그리고 그것의 총체인 역사가 소외당한 세계에서 인간답게 "대우"받지 못하고,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취급"당할 때, 그리고 그것이 더 이상 저항하고 투쟁하여 극복해야 하는 문제로 의식되지 않고, 공허와 권태로 지겹게만 느껴질 때,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비인간적인 일자리라도, 그것이 강제가 아니라 내 선택이었다는 점에서만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 때, 나 역시, 그런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소설에는 "취급"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온다.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취급"하는지의 문제가 미키 같은 어리숙한 캐릭터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런데도, 소설에서 미키는 익스펜더블 일을 하기로 한 것을 두고, 자신이 "선택"했다고 표현한다. 그에게 이 일은 강제가 아니었으므로 선택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므로 자유로운 선택은 아니었다. 그래서, 익스펜더블 일을 앞두고 그의 교육을 맡은 담당자는 미키에게, 당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있으며, 당신이 이곳에 온 것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었다, 라고 말하지만, 미키는 꽤 오랫동안 자신의 비합리적인 선택을 강제당한 것은 아니, 라는 이유에서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한다. 아마도, 미키는, 익스펜더블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일자리가 아니라고 인정한다면, 쓸모 없게 느껴지는 자기 자신을 새롭게 실현해보고자 했던 자신을, 또 다시 저 깊은 동굴 속으로 내던져야 하고, 사정이 그렇게 되어 버리면, 그러한 공허와 허무의 한복판에서 자신은 어떤 존재로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의 문제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미키는, 대강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




소설가가 택한 서사의 형식과 감독의 답


이미지 출처: 다음 포토


다음으로, "소설가가 택한 서사의 형식"에 관해 말하자면, 에드워드 애슈턴은 각 챕터에 소제목을 쓰지 않고, 숫자만을 쓰는데, 홀수 챕터에선 현재 미키가 겪는 상황을 묘사하고, 짝수 챕터에선 과거 사건에 대한 미키의 기억을 들려준다. 짝수 챕터가 미키가 들려주는 역사인 셈이다. 가령, 자신이 어떻게 개척 행성에 오게 되었는지, 그동안 인류는 행성 개척 사업에서 얼마나 실패를 거듭하였는지에 관해 들려준다. 전자에 관해서는 친구와 관련된 자신만 아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후자와 관련해서는 사람들이 잘 읽지 않는 역사 자료 등을 통해 들려준다. 이를 통해, 미키는, 승자에 의해 쓰인 드러난 이야기가 아니라 숨은 진실을 전해준다. 소설은, 역사학자를 꿈꿨던 미키를 통해, 아직 역사가 되지 않는 현재의 사건과, 역사에서 주변화되어 버린 진실한 이야기를, 나란히 배치하여 들려줌으로써, 역사가 기록되는 방식을 되돌아보게 한다. 소설은, 미키 반스, 미키1, 2, 3, 4, 5, 6, 7이 당하는 "취급"의 문제를 통해 인간을 다루고, 서사 형식을 통해 "역사"를 다룬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봉준호 감독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감독은 "취급"의 문제를 더욱 극적으로 다루었고, "역사"의 문제에 관해서는, 질문을 변형한 것으로 보인다. 에드워드 애슈턴이 "역사란 무엇인가"를 물었다면, 봉봉준호 감독은 "애드워드 애슈턴이 문제삼은 '소외된 역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묻는다. 감독은 소설가의 질문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정한 것이다. 그래서, 감독은 <미키7>을 <미키17>로 변형하여, 소모품으로 활용되는 인간 존재의 취급 문제를 더욱 비판적이고, 극적으로 표현했고, 마셜에 맞선 미키의 연인인 나샤와 개척 행성의 크리퍼를 통해, 백인에 의해 소외당해온 흑인과 원주민의 역사를 전면에서 강변한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소설 <미키7>이 던진 질문, 즉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마치 "이것이 진짜 역사다!"라며 되돌려주는 것 같다. 또한, 감독은, 전작인 <기생충>의 마지막 장면에서 기택(송강호 분)이 원주민 코스튬을 하고 박사장 집 마당 한복판으로 달려나가 살해하는 장면의 의미를, 이 장면에서 변주한 것 같다. (<기생충>에서 기택은 근세의 악취를 맡고 인상을 쓰는 박사장에게 달려든다. <미키17>에서 나샤는 아기 크리퍼를 죽이려는 마셜 부부를 향해 그들의 폭력성을 역설하며 크리거를 향해 몸을 던진다.)




소설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있는 요소


<미키 7>을 <미키17>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변형하여, 우리 시대의 문제를 더 비판적이고 극적으로 다루는 한편, 역사에 관한 새로운 질문을 마주하게 했다면, 더 나은 방식으로 체험하게 할 수 있는 요소도 있지 않을까. 원작과 다른 새로운 요소를 발견하는 즐겁지만, 원작보다 더 나은 요소를 발견할 때 그 예술 형식과 창작자의 고유성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더욱 즐겁다.


소설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사건마다 캐릭터의 성격이 드러나는 방식이 내게는 크게 설득력이 없었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에서 미키는 마셜에게 저항하는데, 미키가 직전의 죽음을 통해 깊은 실존적 경험을 했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새롭게 창조하기로 결단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캐릭터의 변화에 크게 설득되지는 않았다. 소설의 특성상, 그것은 독자의 상상력에 달려있다고 해도 말이다. 소설에서, 나샤는 매우 적극적으로 미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열정적인 캐릭터인데 그녀에게 그러한 성격을 완성시킬 사건은 일어나지 않으며, 마셜은 자기 외 존재에 대해 매우 배타적인 성격으로 보이는데 그 역시 그 성격이 사건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미지 출처: 다음 포토


영화는 인물의 성격을 사건으로 보여줌으로써, 캐릭터를 더욱 적극적으로 완성한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마셜을 향해 미키가 저항적 파토스(Pathos)를 드러내는 사건은, 영화에서 미키의 연인인 나샤의 사건이 된다. 그런데, 이 사건은 아무래도 나샤에게 더 잘 어울리는 사건 같다. 캐릭터의 특성상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나샤가 그 역할을 맡는 것이 더욱 개연성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흑인 여성인 나샤가 그 사건의 주체가 되는 것이 이 영화의 의도에 부합하기도 하지만, 성격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나샤에게 더 어울리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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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소설에선, 미키7과 미키8이 크게 갈등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다가도 별 일 없이 사건이 진행되는데, 영화에선, 미키17과 미키18의 욕구가 크게 부딪힌다. 두 미키의 갈등을 보고 있으면, 어쩌면 같다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 그렇게나 갈등하는 것이 설득력이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모두에 존재하는 인간의 이면을 생각하면, 매우 설득력이 있는 갈등이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은 매우 이질적이며, 때로는 의식의 세계가 무의식의 세계와 반대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나 다른, 미키17과 미키18이라는 '더블'은, 인간 자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이러한 무의식에 관한 모티브는 소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장면이 미키의 꿈의 이미지인데, 영화에서는 그 꿈에 나오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다루지 않는 대신, 미키17의 무의식의 존재미키18로 드러내는 방식을 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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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소설 속 미키17의 꿈의 세계의 존재와, 소설의 끝부분에 등장하는 의식의 세계에서의 미키7의 저항적 면모는, 영화에서 버려지지 않았다. 다만, 영화는 그 모티프를 그대로 차용하되, 그 형식만을 차용하였다. 미키7의 무의식의 세계는 미키18에게로, 미키7의 저항적 면모는 나샤에게로 옮겨져 더욱 영웅적으로 변모한 것이다. 미키18은 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취급의 문제에 대해 저항한 한편(이를 알 수 있는 장면을, 나는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봤는데, 미키18은, 독재자 마셜이 미키17을 어떻게 취급했는지를 미키17에게 듣고선 가장 분노한다. 이후, 미키18은 마치 독립 투사 같은 결연한 모습으로 마셜을 향해 총을 겨눈다.), 나샤는 주로 소외된 집단에 대한 취급의 문제에 대해 저항(영화의 끝부분에서 나샤는 마셜을 향해 크리거 집단을 변론하며 인간의 폭력성을 비판한다. 그리고 아기 크리거를 살리기 위해 몸을 내던진다. 이렇게 그녀는 독재자를 향해 의분을 드러내고 약자를 위해 투신한다.)한 것이다.


이미지 출처: 다음 포토


그렇다면, 소설 속 미키7의 영웅적 면모가 영화에선 나샤에게 입혀졌다면,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 미키17 혹은 미키18은, 도저히 영웅적 캐릭터가 될 수 없는 것일까. 영화에서도, 그는 여전히 영웅이 되는데 성공한다. 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미키18의 결단을 통해 해결된다. 미키17의 리비도(libido), 즉 미키18은 집단을 위해 죽음을 결단하는 데까지 자신의 본능적 에너지를 고양시켰고,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새롭게 창조했고, 그 기억은, 그에게 그리고 집단에게 역사가 되었으며, 그렇게 역사가 된 기억은 남은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그들 전체가 역사적 지평에 자신을 위치시키게 된 것이다. 부당한 취급의 문제에 시달리던 미키 반스는, 자기 존재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분노'하며, 미키18로 살았지만, 그 분노를 독재자 마셜 일당을 향한 '의분'으로 고양함으로써, 자신을 새롭게 창조했다. 새로운 공동체가 건설되고 여전히 어리숙한 표정으로 나샤를 보좌하고 있지만, 미키는 이제 새로운 공동체의 새로운 일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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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기술에 대한 감독의 관점


끝으로, 기술에 대한 감독의 관점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물론, 비판적이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을 통해, 생각보다 꽤, 더, 아주, 많이, 비판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마지막 장면을 통해 했다. 감독은, 인물들이 익스펜더블 기계를 폭파하는데 합의하고, 그것을 매우, 유쾌하고, 통쾌하게, 폭파하는 장면으로 영화를 끝낸다. 내게 이 장면은, 일종의 시의성 있는 퍼포먼스로 보였다. AI 기술 개발로 인한 위협을 아무리 정확히 예측하려 해도, 그것은 일어날 위협의 가장 추상적인 하한선일 뿐이라는 염려로, AI 기술 개발을 중단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명하는 여러 분야의 움직임에, 감독은 영화로써 참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감독에게는, SF를 시도하려는 뜻이 있었다기보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꼭 SF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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