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key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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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key 17
한국 | SF | 2025.02.28 개봉 | 15세이상 관람가 | 137분
감독 봉준호
소설 <미키7>과 영화 <미키17>에서 '미키7'과 '미키17'은, 깊은 동굴에 빠진 채 괴생명체 '크리퍼들'에게 잡아 먹힐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멍청한 죽음"을 맞게 될지는 몰랐다고 고백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자기 자신으로 재프린트될 수 있는 '익스펜더블'로 취업한 이유가, 기계조차 하지 못할 일을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해내는 것인데, 그럼으로써 인류를 위한 행성 개척 사업에 봉사한다는 의미나마 찾아보려는 것인데, 우연히, 깊은 동굴에 빠져 버린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두고 "멍청한 죽음"이라고 표현하는 '미키'의 상황이, 어리숙한 '미키'의 캐릭터와 '미키'의 직무 때문에, 그에게 그렇게 중요한 상황처럼 보이지 않지만, '익스펜더블' 기계를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그조차도, "멍청한 죽음"은 꼭 피하고 싶었다. 삶이 반복된다고 해도, 종결의 순간에 각자는 자기 삶과 죽음의 의미를 남겨두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소설과 영화는 '미키7'과 '미키17'이 다시는 "멍청한 죽음"을 맞지 않기 위한 분투에 관한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죽음은 인간에게 늘 문제가 된다. 죽음은, 각자에게, 의미를 남기라고, 명령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잠시 동안 의식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잠시 동안의 죽음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는 잠을 두고서도,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잠들기 전 나는 세상의 우연적인 것들에 휘둘린 "멍청한 하루"와 "멍청한 생활"을 반성하고, 내일은 "멍청하지 않은 하루"를 보내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하루에도 "멍청한 삶"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데, 단 한 번의 인생을 사는 나에게, 나의 죽음이, 이도 저도 아닌 "멍청한 죽음"처럼 경험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러한 사태는 상상으로도 감당하기 쉽지 않다. 물론, 일반적인 수준에서 모든 사람의 삶과 죽음은 숭고한 사건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어떻게 경험되는지, 즉 개별자들에게 어떻게 특수하게 경험되는지가 늘 문제가 된다. 나의 죽음을 두고, 나의 장례식에서 다른 사람들이 충실히 살았다며 애도하고 위로한다고 해도, 삶에서 남은 사건은 죽음뿐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내 죽음을 두고, "멍청한 죽음"이라는, 공포스러운 경험을 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멍청한 죽음"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기 때문인지, 이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을 빨리도 모색하게 한다. 그 방안에 대한 모색은 동생의 고마운 고백을 통해 시작되었다. 지난 주말, 동생과 석촌 호수를 바라보면서 주중에 있었던 일들에 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는 요즘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에 가닿았다. 동생은 요즘 다양한 무언가를 부러워하고 갈망하는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할 때 동생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무언가를 어렵게 드러내어서인지,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괴롭혔는지 그 강도가 얼굴을 통해 비춰졌다. 나도 그렇다고 했다. 나 역시 많은 사람과 미디어에 자극받고 그 자극에 이끌리고 휘둘리면서 이것 저것을 욕망하고 그것으로 인한 결핍감으로 힘든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그런데, 대화하다보니,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 이 사실이 우리를 괴롭혔지만, 이 사실이 우리를 살리기도 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은, 그것의 실체가 없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실체 없는 가상의 것들이 우리를 자극하고 없던 욕망을 구성하고 나의 결핍과 부족에만 시달리게 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많은 사람과 다양한 미디어가 이러한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그 실체 없는 것을 갖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라고 한다. 노력해서 경쟁에서 이기라고 한다. 노력해서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지 않았느냐고 자책하게 한다. 우수한 스펙을 쌓고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가지라고 한다. "우수한", 그리고 "선망하는" 어떤 것, 그 실체 없는 것이 내 것인 것처럼 보이게 할 것인지, 그러한 가상의 것이 곧 자기 자신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을 추앙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한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는 과잉 긍정 감정을 추동하고, 신자유주의 세상이 사람들에게 경쟁을 부추기고, 그 경쟁에서 승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낙오감과 박탈감을 느끼게 하고, 나아가 우울감에 빠지게 한다고 지적했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경쟁이 과연 공정한가의 문제는 차치하고,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오만함을, 승리하지 못한 사람은 굴욕감을 느끼는 이러한 사회는, 도덕적으로 괜찮은지를 묻는다.
지난 주말 나와 동생의 대화 상황만 보더라도,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과연 안녕하지 못하다. 안녕하지 못한 상황에서 우리는 스스로 안녕하기 위해 모색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실체 없는 것에 우리를 사로잡히게 하는 사회적 논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면, 개인적 수준에서나마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의식적 노력의 의지를 담은 대화는, 가끔, 일시적으로라도, 서로를 살린다. 교육 과정에서 접했던 많은 교과서와 참고서에는, 현대 사회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그것의 원인을 분석한 후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는 부분에서 "개인적 차원에서 (이러 저러한)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라는 문장 형태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문장 형태의 힘을, 그날 새삼 느꼈다.
이러한 내용의 대화를 동생과 끝낸 후, 나는 그 대화를 자꾸 떠올렸다. 또, 소설 <미키7>을 읽고, 영화 <미키17>을 본 후 "멍청한 죽음"이라는 표현이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 "멍청한 죽음"을 피하는 방법이 이 대화가 될지 모르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실체 없는 가상에 휘둘리며 그것을 열렬히 좇다가 죽는다면, 내가 이 경쟁 사회에서 운이 좋아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누리던 그것들이 내게서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그때 나는 내 죽음을 "멍청한 죽음"으로 경험하게 될 것 같다. 또,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부족과 결핍을 일깨우다 죽는다면, 그때 나는 내 죽음을 "멍청하고 나쁜 죽음"으로 경험하게 될 것 같다. 정말로 경험하기 싫은 무서운 상황이다. 이 끔찍한 미래의 사건을 예방해야겠다. 이는 종교적 가르침을 염두에 둔 결론도 아니고, 신앙적 다짐도 아니며, 현대 산업 자본주의 사회을 살아가는 나의 "멍청한 죽음" 예방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