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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니 Sep 04. 2024

엄마의 36년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책 기획이 하나 있다. 바로 엄마에 관한 책이다.

약 5년 전 멀리 소풍을 떠나버린 우리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엄마는 아주 오래전부터 가계부 겸 짧은 일기를 써오셨었다. 검은색 인조가죽 커버에 금색이나 은색으로 그 해의 연도가 형압 처리되어 있는 옛날식 노트를 쓰시거나 작은 손 노트 같은 것들에 기록을 해오셨다. 엄마가 기록을 꾸준히 해오고 계시다는 걸 안 것은 고등학생 때쯤이었던 것 같다. 안방 화장대에는 이런 기록 노트가 항상 펼쳐져 있는 고정석이 있었는데 오며 가며 흘끔흘끔 엄마가 뭘 하셨나 훔쳐보곤 했다.

 

 그 안에는 그날 그날 무엇에 지출을 했는지, 어떤 이벤트가 있었는지, 엄마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짧게는 한두 줄, 길게는 서너 줄 정도로 적혀 있었다. 일기라고 하기엔 너무나 짧았지만 이 정도 분량이기에 그 긴 세월을 꾸준히 기록하실 수 있었겠구나 싶다. 놀랍게도 엄마의 기록 노트는 1983년도부터 돌아가시기 몇 달 전인 2019년도까지가 상자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엄마의 36년 역사가 담긴 이 노트 전부를 유품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 기록들은 우리 집안의 산 역사 그 자체이다. 엄마가 20대 중반에 결혼해 시집으로 들어와 시어머니와 남편 외에 결혼 안 한 시누이와 시동생까지 건사하며 꾸려 낸 가계부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소득이 적은데 식구는 많은 상황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엄마의 씀씀이를 보면 경외감과 안쓰러움이 물밀듯 밀려온다. 몇 십 원 짜리 아이스크림, 고등어 한손 가격뿐 아니라 그 와중에 소소하게 하신 투자 내역까지...... 엄마의 절약과 투자 정신이 노트 안에 찬란히 빛나고 있다.

 

 엄마는 시니컬하면서도 위트 있는 사람이었다. 노트에 가계부 외에 누구를 만나고 무슨 경조사를 다녀왔고 나와 동생에게 있던 이벤트 등등을 써 놓으셨는데 그 표현이 재밌어서 읽다 보면 입꼬리가 씰룩하게 돼곤 한다. ‘우리 엄마가 이런 생각도 했네?’ 하면서. 엄마의 단상이 담긴 6년 전 어느 날의 메모를 발췌 해봤다.


 ‘미국 올케언니 보약 먹으라고 엄마가 백만 원 보내주라 하셔서 송금. 백만 원 송금에 수수료를 35불이나 받는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보낼 때는 15불이라는데. 우리나라 은행은 도둑놈이다.’


비싼 수수료에 야속해 하는 엄마 마음이 전해져서 피식 웃음짓게 된다. 목소리도 들리는 듯 하다. 함께 우스개소리를 나누며 낄낄대던 그 시절이 참 그립다.

 

 엄마는 갑상선암에서 벗어나 저 하늘에서 자유롭게 잘 지내고 계시리라 믿는다. 그렇지만 고작 36년밖에 같이 보내지 못한 딸의 입장에서 엄마의 삶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진다. 너무 착하고 성실하셨어서, 애초에 약하게 태어난 데다 보살핌을 많이 받지 못하셨어서 이 세상에 좀 더 자취를 남기지 못하신 이 아쉬움을 딸이 그림 에세이라는 형태로 풀어드리려 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엄마의 삶을 재조명해 드릴 수 있는 작업을 꼭 세상에 선보이리라 다짐한다.

 

2024년 볕이 아름다운 어느날, 유난히 엄마가 많이 그리운 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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