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정토스트&떡볶이 (5화) 고추밭할매, 아이고 참말로!

중매는 안받는다니까요!

by 해온





달동네 끝 언덕을 지나 마을 쪽으로 내려가면, 멀리서도 붉은색이 한눈에 들어오는 밭이 있었다. 여름이면 태양빛에 반짝이며 매운 냄새가 골목까지 밀려오는 그곳. 사람들은 그 밭의 주인을 두고 "아이고, 고추밭할매 또 나왔네" 하며 혀를 찼다.


고추밭할매는 이 근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해마다 고추농사만으로 손자 대학까지 보냈다는 전설 같은 사람이었다. 허리는 활처럼 휘었지만 손에는 여전히 힘이 넘쳤고, 고무신을 신고 걸을 때마다 발뒤꿈치에서 흙이 튀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돈은 산더미처럼 있지만, 말은 칼날보다 매섭다’고 했다.


은정이 어릴 때, 그녀의 할머니도 그 밭에서 품을 팔았다. 한여름 뙤약볕에 고추를 따고 말리며, 그 품삯으로 손녀의 학용품을 샀다. 그래서 은정에게 고추밭할매는 단순한 노인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젊은 날과, 자신을 키워준 그 시절의 냄새가 묻어 있는 존재였다.


요즘 고추밭할매는 밭보다 '농협 의자'에서 더 자주 보였다. 오전엔 밭을 둘러보고, 오후엔 어김없이 농협 지점 안 구석 자리에 앉았다. 늘 들고 오는 건 붉은 지팡이 하나, 그리고 커다란 보자기 가방이었다.


그 자리에 앉으면 동네 사람 누구든 조용할 틈이 없었다.


"이놈들, 정수기 종이컵은 하나씩만 써야 한다! 세금은 니들만 내나, 나도 내지!"

하며 지팡이를 휘두르고,

"에어컨을 그렇게 빵빵하게 틀면 전기세는 어쩔끼고!"

하며 농협 직원에게 눈총을 줬다.


처음엔 사람들도 웃었지만, 하루이틀이 아니니 이제는 다 피하기 바빴다.


"오늘도 왔네, 고추밭할매."

"그 의자 자기 명의로 등기 칠 기세라니까."


하지만 은정은 달랐다.

장사를 마치고 농협 마감 전 시간에 늘 은행을 찾는 은정은 그 의자 바로 옆에 앉았다.

손에는 비닐봉투에 든 하루 매상인 꼬깃한 지폐들과 동전들을 들고 있었다.

고추밭할매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꼭 한마디 했다.


"아이고, 니는 또 저축하러 왔나. 젊을 때 놀지도 않고 돈만 모으면 늙어서 후회한다."

"그럼 할매는 놀았어요?"

"나는 고추랑 놀았지. 그게 제일 비싼 친구다."

"하하, 그건 인정!"


은정은 농협 직원들이 피곤한 얼굴로 쳐다봐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할매, 오늘은 시비 걸지 말아요. 다들 무서워서 물도 못 마셔요."

"그래야지. 물도 아껴야 나라가 산다. 아이고 참말로, 요새 젊은 것들은 종이컵을 숨 쉬듯이 쓰더라."

"할매가 나라 걱정은 하지 말고, 본인 건강 걱정하세요."

"건강? 나보다 오래 살 애가 누가 있노."

"은정이가요."

"이 년이 또 입은 살았네!"


그렇게 하루가 흘렀다.

은정은 하루 장사를 끝내면 꼭 농협에 들러 저축을 하고, 할매는 그 옆에서 구경하며 잔소리를 쏟았다.

하지만 은정은 그게 싫지 않았다.


말은 거칠어도, 그 말 속에는 사람이 있었다.

할매는 결국 외로운 사람이었다.

자식들은 다 도시로 떠났고, 밭일은 이제 절반도 직접 못 했다.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도, 다들 "바빠요" 하며 지나쳤다.

그래서 매일 농협으로 오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거였다.

사람을 보고 싶어서, 누군가 자기 말에 대꾸라도 해줬으면 해서.


그날도 은정은 저축을 마치고 "내일 봬요, 할매." 하며 농협을 나섰다.

할매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일은 오지 마라. 내일 또 오면 니 시집보낸다."

"네? 무슨 말이에요?"

"내가 중매 하나 섰다. 포도밭총각이래. 나이 마흔 둘이라는데, 착하고 성실하다."

"포도밭... 총각이요?..총각..?"

"총각이지. 머리숱은 좀 없고 배는 좀 나왔지만, 남자란 게 다 그런기라."


은정은 멍하니 웃었다.


"할매, 나 장사하느라 시집 갈 시간도 없어요."

"그럼 장사 접고 가라. 여자는 늦기 전에 장가 보내야 된다."

"장가가 아니라 시집이요."

"그게 그거다!"


은정은 농협을 나서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오자 할머니가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너, 오늘 고추밭할매가 뭐라는지 안대?"

"모르겠는데요?"

"중매 섰담서. 그 나이 많은 포도밭총각이랑. 어이가 없어서 내가 당장 농협으로 뛰어갔다, 그 할망구한테!"

"헉, 할미가 진짜 갔어요?"

"그럼 가야지! 내가 손주도 안 보고, 일만 해서 너 키웠는데, 그딴 총각을 보낸다고? 아이고 내가 세상 살다 별 꼴을 다 본다!"


그날 저녁은 온 동네가 시끄러웠다.

은정은 눈치껏 할머니 팔에 매달려 애교를 부렸다.


"할미~ 화 풀어요. 그 할매는 그냥 장난친 거예요. 심심하니까 그랬겠죠. 나 그런 총각 안 봐요, 알았죠?"

"안 봐도 돼. 보지마라!"

"그럼 됐잖아요~"

"그래도 그 할망구는 참!"

"내일 가서 내가 말할게요.."


다음 날, 은정은 약국에서 박카스 하나를 사 들고 농협으로 향했다.

역시나 고추밭할매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늘도 다른 손님을 향해 지팡이를 흔들며 고함을 치는 중이었다.


"정수기 종이컵은 하나씩만 써야 된다니까, 이놈들아! 그게 나라 살리는 길이다!"

"할매!"


은정이 손을 흔들자, 할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왔나."

"아이고, 할매~ 왜 우리 할미를 건드려요. 건드리길!"

"그 여편네가 나한테 지팡이 들더라니까. 아이고 참말로, 세상 무서워서 중매도 못 서겠다."

"그러게 왜 포도밭총각이에요. 40대 아저씨는 너무하잖아요."

"그 총각이 돈이 많다더라."

"그럼 할매가 가세요."

"야!"


은정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박카스를 내밀었다.


"자, 이거. 화 푸세요. 오늘은 제가 사드리는 거예요."

"이게 뭔데."

"비타민이에요. 고추보다 안 맵고 더 달아요."


할매는 웃는 걸 참으려다 결국 터져 나왔다.


"이 년이 참말로 웃기는 년이네."

"그쵸. 근데 웃었죠? 화 푼 거예요."

"됐고, 일이나 해라."

"일 안 해요. 오늘은 모시러 왔어요."

"모시러?"

"네. 저랑 같이 떡볶이 트럭으로 가요. 오뎅국물 드시러 가세요."


은정은 할매 팔을 붙잡고 트럭 쪽으로 향했다.

주변 사람들이 속삭였다.


"야, 은정이 진짜 대단하다. 저 할매를 움직이다니."

"박카스 하나로 세상 평화네."


트럭에 도착하자 은정은 의자를 내주고, 국물을 따뜻하게 따라드렸다.


"드세요. 국물은 서비스."

"서비스는 싫다. 돈 낼 거다."

"할매, 나 돈 있어요. 할매한테는 사랑으로만 받을 거에요."

"사랑은 배불러?"

"할매한테 사랑 많이 받으면 배불러요."

"하이고, 입은 살았네."


뜨거운 국물 한 모금이 할매 입으로 들어가자, 잠시 말이 끊겼다.


"이 맛이 진짜다."

"그쵸? 아싸! 고추밭할매 인증받았다!"

"인증은 무슨. 그래도 괜찮네."


은정은 슬며시 휴대폰을 꺼냈다.


"할매, 손주 번호 있어요?"

"몰라. 다들 바빠서 전화도 안 해."

"그럼 제가 전화 걸게요."


은정은 할매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스피커폰을 켰다.


"엄마?!" 하고 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니가 그 은정인가?"

"네. 은정이에요. 할매가 보고 싶대요."

"진짜요, 엄마?"


할매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고추 잘 크고 있다고 말해주려고."

"엄마, 주말에 갈게요."

"그래, 오지 마라. 귀찮다."

"그래도 갈게요."

"하이고 참말로."


전화를 끊자 할매 눈가가 살짝 젖어 있었다.

은정은 조용히 오뎅 국물을 리필해주며 말했다.


"할매, 손주 보고 싶으면 이리로 오세요. 그리고 언제든 국물은 무료예요."


할매는 대꾸 대신 젓가락으로 오뎅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은정아."

"네?"

"니는 참... 징한 년이다."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래, 칭찬이다."


트럭 앞에 석양이 내리며 붉은빛이 퍼졌다.

할매는 국물을 다 마시고 천천히 일어섰다.


"내일도 올 거지?"

"물론이죠. 할매가 있으니까요."

"아이고 참말로."


그날 이후, 농협 의자에는 여전히 고추밭할매가 앉았지만,

이제는 종이컵 들고 물 마시는 사람에게 지팡이를 휘두르지 않았다.


그 대신, "은정이 떡볶이 먹고 가라. 세상은 맵게 살아야 한다."

그 소리가 농협 로비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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