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의 솜털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나물

by 해온

코끼리처럼 두툼하게 부어 욱신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꾹꾹 눌러가며 늦은 저녁시간을 보내던 중, 문득 오랜만에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출간을 준비하며 1분을 10분처럼, 10분을 1시간처럼 늘려 써버린 탓이었을까.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민들에 윤활유 한 번 뿌리지 못한 채, 뇌를 고문에 가깝게 굴려댄 탓이었을까. 한동안 나는 글을 멀리하고 있었다. 소재가 마땅치도 않았거니와, 퇴고를 반복하느라 미뤄둔 사소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한여름 턱 끝까지 차오른 열기를 토해내듯 숨 가쁜 시간을 보내야 했던 탓이기도 했다.


알람은 항상 제 할 일을 한다. 삼 년은 쓴 낡은 휴대폰이 시간만 되면 몸을 흔들며 나를 깨울 텐데, 요즘의 나는 그보다 먼저 눈을 뜬다. 징그럽게도 잠이 많던 내가.


‘아, 이런 부지런함 따위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데..’


자는 동안 빠진 다리의 붓기는 어쩐지 조금은 괜찮은 하루를 데려올 것만 같다.


아이 셋을 챙겨 아침을 먹이고, 설거지를 마친 뒤에야 신발을 챙겨 신고 집을 나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코끝을 베듯 차갑던 공기가, 이제는 그저 간질거리기만 한다. 봄이 왔다고, 벌써 꽃가루가 먼저 안부를 묻는 모양이다.


몇 대를 보내고서야 간신히 올라탄 버스. 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창밖을 본다. 잎 하나 없이 앙상하던 가지에 언젠가 엄마 장롱 속에서 보았던 연녹색 치마저고리 같은 색의 새싹이 올라와 있다.

젠장.


사람들에게 나는 항상 더운 여름도, 추운 겨울도 싫어서 따뜻해지는 봄이 좋다고 했건만 사실은 봄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다. 나는 아직 겨울을 살고 있는데, 세상은 벌써 봄인 게 싫다. 나만 시린 것 같아서. 나만 추운 것 같아서.


버스에서 내려 바로 보이는 화단은 이미 봄으로 가득하다. 쥐똥나무, 편백나무, 철쭉나무, 매화나무, 매실나무 조그맣게 올라오는 새순들이 얄미울 정도로 귀엽다. 참 옹졸하다. 이렇게까지 얄미워할 일인가 싶으면서도, 마음이 그렇게 반응하고야 만다.


조경수 사이로 어린 쑥이 보인다. 어린 시절이 떠올라 시간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쪼그려 앉았다. 코를 가까이 들이댄다. 봄이다. 봄냄새다. 냄새로 먼저 아는 계절, 봄. 이 작은 것도 쑥이라고 제법 쑥 냄새를 뿜어낸다. 쌉싸래하게.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찰나, 실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쑥잎이 파르르 뒤집히며, 그 아래 숨겨져 있던 새하얀 솜털을 드러낸다.


문득 떠오른 우리 집 아이들 얼굴에도, 저 쑥잎 같은 솜털이 가득하다.


며칠 전, 이제 막 중학생이 된 둘째가 샤워를 마치고 앉아 거울을 보는 내 뒤에 앉아 소란을 피웠다.


“히익. 엄마, 흰머리 왜 이렇게 많아?”

“글쎄. 유하가 속을 썩여서 그런가 보지.”


아뿔싸.

사춘기의 아이는 플라타너스 열매처럼 까칠하지만, 속은 여전히 여리다. 그걸 알면서도 잊었다. 아이의 눈에 금세 물이 고인다. 이미 충분히 속을 태워놓고도, 뭐가 그리 미안한지 내게 연신 사과를 한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뒤늦게 멈칫한다.


생각해 보니, 우리 할아버지는 온 머리가 새하얬다. 나는 그 백발이 좋았다. 혹자들은 흰머리더러 머리에 눈이 내려앉았다고 표현했지만, 내 눈에는 구름 사이로 흘러내리는 햇살 같았다. 할아버지는 가끔, 언제 이렇게 늙었는지 모르겠다며 머리를 쓸어 넘기곤 했다. 그땐 그 말이 잘 와닿지 않았다.


좋아는 했지만 막상 내 머리에서 흰머리가 여남은 개나 나오고 나니 이거 참 기분이 묘하다. 나도 이제 정말 나이가 들고 있구나. 나는 이게 더 나중의 일일 줄 알았다. 예순여덟에 돌아가신 할머니도 그랬고, 예순다섯의 엄마도 흰머리가 거의 없으니까.


둘째가 염색을 해보면 어떻겠느냐며 휴대폰을 들이민다. 어느새 검색해 둔 염색약을 턱밑까지 바짝 들이대며.


“노안 와서 그렇게 가까이 대면 안 보여.”


빌어먹을 이놈에 주둥이.

멈칫하던 아이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쑥잎 아래 숨겨진 솜털처럼, 아이의 볼에 뽀얗게 돋아난 솜털도 같이 떨린다.


나는 아이를 끌어안는다.


“가까이서 잔소리 듣는 것보다 멀리서 듣는 게 낫지. 안 들리잖아. 안 그래?”

“그게 뭐야아.”


그래도 다행이다. 아직은 내 품이 더 넓다. 그리고 또 다행이다. 눈이 조금 흐릿해졌어도 어린 쑥 같은 아이 볼의 솜털쯤은 아직 선명하게 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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