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꼭 사줄게

끝내 거짓말이 되어 버린 약속

by 해온

"다음에 사줄게."
"조금만 기다려."
"기억해 둘게."


손에 꼽아가며 그날의 약속을 기다렸다. 그것이 거짓말일지언정 속에 품은 뜻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으니 당장 내 귀에 들린 한 마디를 그대로 믿었다.


나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물욕이 적은 편이었다. 아는 것이 많아야 가지고 싶은 것도 많아지지 않겠는가. 허나 내 세계는 너무 좁았다. 산과 들, 집. 그게 전부였다. 외부의 영향이라고 해봤자 정해진 시간에 흘러나오던 방송뿐. 눈앞에 놓인 것들로만 이루어진 삶 속에서, 갖고 싶다는 마음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자랐다.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감정이 생긴 건 열다섯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빨간 석류알 같은 여드름이 이마에 돋고, 똑단발 머리 끝마다 사춘기가 매달려 있던 여중생 시절. 친구들의 가방 안에는 내가 모르던 세계가 들어 있었다. 화장품, 다이어리, 연예인 잡지. 내게는 그저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으나 견물생심이라고 했던가. 노트와 필기구, 도시락만 들고 다닐 줄 알았던 내 가방 속은 그들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처음으로 부모님께 졸랐다. 한여름 뙤약볕에 말라버린 논처럼 퍼석했던 엄마의 손을 붙잡고, "나도 하나만"을 외쳤다. 당장 날아온 매질은 어린 내 등에 빨간 서운함으로 남았다. 부모의 사정을 알 리 없던 철없는 중학생은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원망을 품고는 저녁도 먹지 않고 이불속으로 파고들어 베갯잇을 적셨다.


입도 짧고 편식도 심했던 내가 유난히 좋아하던 건 무말랭이 무침과 김치를 넣어 볶은 김치볶음밥이었다. 곯은 배를 걱정했을 엄마는, 못된 딸년을 위해 한밤중에 쉬지도 못하고 본인의 쓰린 속은 뒷전으로 밀어두고는 그 밥을 만들어 방 안으로 들이밀었다. 그러나 콧구멍을 파고드는 매콤 달콤한 냄새를 외면한 채, 나는 끝내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괜한 자존심 하나로 밤을 버텨냈다.


그렇게 처음으로 "다음에 꼭 사줄게."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마흔둘이 된 지금, 나는 세 아이에게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생김새도 성격도 나를 닮은 아이들은, 필요한 것이 있어도 쉽게 입을 떼지 않는다.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으면서도 먼저 나서서 채워주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나는 자꾸만 초라해진다.


아이들이 잠든 밤이면 이곳저곳을 뒤져 조금이라도 저렴한 곳을 찾아낸다. 망설이다가 결국 주문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내 마음 한 구석에 하나씩 적어 내려간다.


갚지 못한 것들과 미뤄둔 것들과 끝내 다 주지 못한 것들 아래에.


"다음에 꼭 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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