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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마로나

L'extraordinaire voyage de Marona, 안카다미안


동물이 보는 색은 흑백 - A


개와 고양이가 보는 세상은 흑백이라고 한다. 엄밀히 따지면, 적록색맹. 즉 파란색과 노란색은 구분되지만, 인간보다 다양한 색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는 못한다. 인간-동물과 동물이 각기 다른 색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환상의 마로나>에서 마로나가 주는 절대적 사랑이 결코 인간의 사랑과 등가일 수는 없음을 보여주듯이 말이다. 그리고 보통 인간과 동물의 사랑의 절대적 불균등에서 보다 더 사랑하는 쪽은 인간은 아니다.


영점의 영점, 이름도 과거도 미래도 없는 순간에서 영화는 시작하고 끝난다. 로드킬 당한 마로나에게 목소리가 부여되고 그는 자신의 영화를 그려낸다. 어디까지나 상상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동물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하는 한계에서 시도되는 2D와 3D 애니메이션의 융합은 디즈니와 픽사가 만든 동물 캐릭터의 인간중심적 의인화보다 자유롭게 미지의 감정을 감각으로 느끼게 하며, 형식 자체로서는 영화의 범주를 확장시킨다.


동물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영화에서 인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동물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지만, 함께 하기 위해 동물은 인간의 언어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엄마의 말처럼, 영화 초반 마로나와 형제들은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마로나가 세상 밖으로 나갈 때 혹은 버려질 때, 그는 책에서 본 것들로 세상을 인식한다. ‘아홉’으로 태어난 마로나는 행복도 1/9라고 생각했지만, 첫 번째 친구 마놀을 만나며 1의 사랑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1의 사랑을 지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색을 이용해 바라보고, 1의 사랑을 제외하고 다른 인간은 구체적 형상이 없거나 어떠한 특징만 남은 채로 표현된다.


마로나는 마놀의 아나, 이스트반의 사라, 솔랑주의 마로나가 되며 사랑과 체념 그럼에도 사랑하기를 알게 된다. 마로나는 세 인물과 세 공간을 거쳐가며 자유롭게 모든 걸 함께 했던 마놀은 곡선적 이미지로, 건축업자인 이스트반은 직선적 이미지로, 아직 어리기에 가능성으로 가득한 솔랑주는 아코디언과 같은 이미지로 그려낸다. 이러한 변주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그들의 색이기도 한데, 가장 온전하게 사랑했던 마놀은 가장 잘 인식할 수 있는 색인 완연한 노랑으로, 사랑했지만 마지막의 냄새를 풍기곤 했던 이스트반은 노랑 다음으로 지각 가능한 파랑으로,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지만 아직은 자신이 더 중요한 솔랑주는 파랑머리와 노란 피부이다. 마로나에게 행복은 노란색이다.


실사영화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동물의 이야기는 공감을 우선으로 하게 되는 것 같다. 인물과 공간을 쉴 새 없이 옮겨 다니는 마로나가 죽음과 삶 사이에 있는 작은 영혼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에 의문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나 역시 마로나와 닮은 강아지가 떠올랐다. 길을 걷다 보면 로드킬 당한 동물들을 종종 보게 된다. 항상 발견은 늦는다. 그날은 달랐다. 아직 살아있는 강아지를 둘러싸고 몇 사람은 울고 있었으며, 자신의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얼어붙어 있었고, 그런 풍경 속에서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했으나 아무도 쉽게 도와줄 수 없었다. 강아지를 치료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도와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경찰에 신고하니 새벽에 시신을 처리하러 온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 그 아이는 살아 있는데, 말이다. <환상의 마로나>를 보고 그 아이의 희고 커다랗고 부드럽고 애처로웠던 몸통이 떠올랐다.


동물을 비롯하여 로봇과 물질과 같은 비인간의 권리가 화두인 현태에 돌본다 혹은 키운다라는 것은 결국 어떤 의미의 관계 맺기를 전제로 하는 것일까? 인간 친화적인 동물이 가축에서 애완으로 그리고 반려로 … 나쁜 인간만 없다면, 인간이 지구를 모조리 차지하지만 않았다면 떠돌이개도 아홉으로 태어나 아홉 개의 행복을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영화에는 희망과 절망이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 둘은 정도만 다를 뿐, 공존하고, 그렇다면 <환상의 마로나>에서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마로나의 회전목마 - 서너시


여기 흰 주둥이와 까만색 하트모양 코, 동그란 눈, 그리고 폭신폭신한 꼬리를 가진 강아지가 누워있다. '9, 아나, 사라, 마로나'라는 이름을 가진 강아지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마로나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주마등을 함께 본다. 그것은 <환상의 마로나>라는 영화면서, 강아지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견생'의 기억이다. 


9남매 중 9번째 강아지로 태어난 마로나는 '9'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갖게 된다. 인간이 아니라 개인 어머니로부터 얻게 된 이 이름은 나중에 이름이 바뀔 때를 대비해 붙여진 예비적 이름이다. 마로나의 어머니는 강아지들에게 인간과 함께 할 삶을 준비시킨다. 그녀는 인간이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가 강아지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알고 있으며, 개는 인간의 언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친다. 남매들과 서재를 뛰어노는 마로나의 모습 뒤로 빼곡히 꽂혀있는 책에는 인간의 지식이 담겨 있다. 책에 그려진 다양한 삽화와 지식들은 거리로 나간 마로나의 눈에 간판, 사람의 얼굴 등으로 오버랩되는 한편,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강아지의 세계와 겹쳐진다. 


책 속에 담긴 인간의 지식과 개의 경험, 인간의 우주와 개의 우주, 인간의 세계와 개의 세계는 같이 놓이는 듯싶다가도 다른 층으로 분리되고, 다른 길로 갈라진다. '아나, 사라, 마로나'로서 '9'는 곡예사 마놀, 건축업자 이스트반, 솔랑주 가족과 만나고 이별한다. 그들은 아나, 사라, 마로나라는 이름을 남기고 마로나의 궤도에서 벗어난다. 이름은 인간이 강아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쉽고 간단한 것이지만 강아지에게 그것은 기억의 형태로 각인된다. 개였던 마로나의 어머니는 알지만 마놀, 이스트반, 솔랑주는 알지 못하는 사실이다. 인간이 모르는 게 이뿐만인가. 강아지들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인간의 말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나는 냄새로 마로나는 이별의 징조를 감지한다. 모든 감각과 주의를 기울여서, 강아지는 인간을 이해한다. 


그에 비해 인간은 강아지의 전부가 되기에 너무나도 나약하며, 탐욕스럽고, 무책임하다. 마놀의 꿈과 성공 앞에서, 이스트반의 가족 앞에서, 솔랑주의 또래 친구들 앞에서 마로나는 그들과 헤어져야 한다. 지금 그대로의 삶에 행복을 느끼는 강아지와 달리 인간은 항상 '새롭고 갖지 못한 것'을 원한다. 이렇게 인간의 책이 강아지를 남겨 두고 다음 챕터로 한 장 넘어갈 때, 마로나의 영화에서는 아나와 사라, 마로나의 기억이 끝나지 않은 채 재생된다. 


“그런데 개는 부분 색맹인데 어떻게 이런 알록달록한 색채로 세상을 보나요?”, “그래 봤자 사람이 상상한 개의 삶 아닌가요? 인간중심적 사고로 그려진 거죠." <환상의 마로나>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애니메이션 영화이고, 개의 시각(혹은 삶)은 애초에 인간이 경험 불가능한 영역임에도 이런 의문이 든다면, 이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인간들에게 개의 입장에서 상상하는 자세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면 된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마로나와 달리 여기에 나오는 인간들은 도저히 상상의 산물 같지가 않다. 인물들의 성격과 태도가 (빨갛고 파랗고 노란데도) 얼마나 좋지 못한 쪽으로 현실적인지 그 핍진성 때문에 중간중간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환상적인 이미지와 있을 법한 이야기의 간극은 마로나의 주마등을 인간들의 서재 속 '환상 동화'와 '사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게 만든다. <환상의 마로나>는 마로나가 자신의 기억들을 기록하고 재생하게끔 할 뿐만 아니라, 완결된 기록으로 끝맺지 않도록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같은 대사(“다들 괜찮다면, 내 인생의 영화를 돌려 보려고 한다. 죽을 때는 그런다고 들었다. 인생이 영화처럼 스쳐 간다고.”)로 첫 장면과 연결되며, 이를 통해 마로나의 영화는 무한루프로 반복재생되어 이어진다. 종결되어 책 속에 박제되지 않고 계속해서 생동하는 이야기로,  '9, 아나, 사라, 마로나'의 이름은 반복된다. 계속되는 이름의 기억 속에서 죽음이 오지 않을 것처럼. 




네 이름이 뭐니? - 난둘


갈색 털을 가진 믹스견에게는 총 네 개의 이름이 붙여졌다.


‘아홉’, ‘아나’, ‘사라’, ‘마로나’.


강아지는 그 이름을 모두 가진 채로 죽었다.


강아지에게 이름들은 대체되지 않고 공존한다. 그 강아지가 자신의 이름들과 관련한 모든 기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솔랑주라는 반려인을 만나 삶을 살아가던 마로나 시절의 강아지는, 자신을 아나라고 부르며 키웠던 서커스 단원이 탑승해 있을지도 모를 서커스단의 버스를 발견하고 미친 듯 짖으며 그 버스를 따라가려 한다. 몇 년이라는, 우리보다 삶의 속도가 빠른 강아지에게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마로나는 아나 시절로 순식간에 되돌아간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간직하는 방식, 즉 자신의 삶을 간직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부모 혹은 타인에 의해 주어진 이름으로 불린다. 이는 강아지와 비슷하지만, 인간은 낯선 곳의 낯선 이에게도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나는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타인과 만나며 쌓이는 궤적에 무뎌지도록 만든다고 믿는다.


강아지는 누구에게라도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므로 강아지는 어떤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또한, 강아지는 특유의 기민한 감각으로 사소한 것에도 쉽게 흥미를 느낄 수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환상의 마로나>가 보여주는 강아지 시선의 세계는 그야말로 별천지다. 빨간 공 하나, 담요가 덮인 작은 박스 하나에도 세상 제일가는 부자가 된 듯 행복해하는 강아지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아지는 인간보다 짧은 삶의 궤적을 특별한 경험으로 채워갈 수 있다. 물론 떠돌이 강아지의 삶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강아지가 자신을 특별한 대상으로 불러주고 사랑을 나누어 준 모든 인간에게,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공평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사랑이 공평할 수 있는가 반문한다면, 그 사랑을 주는 생물이 강아지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라 답할 것이다.


강아지는 자신에게 사랑을 준 대상에게, 그 대상이 가진 마음의 크기가 자신의 마음의 크기와 달라지더라도 언제나 똑같은 사랑을 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에 <환상의 마로나>를 보며 무력하게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홉’은, ‘아나’는, ‘사라’는, ‘마로나’는 언제나 자신의 감각에 비춰 보았을 때 무한한 애정을 준 것처럼 보이는 인간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줄 것이다. 강아지는 그럴 수밖에 없다.


이처럼 변하지 않는 공식에 상처받는 것은 누굴까. 인간에게 잔인하게 학대받아도 변함없이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를 찍은 영상들을 인터넷에서 발견한다. 그 영상들은 인간이 강아지들을 연민하도록 만든다. 그러면서 강아지를 연민할 만한 대상으로 만든다. 나는 강아지를 연민하고 싶지 않다. 나는 강아지들이 자신을 괴롭힌 인간을, 그리고 자신을 괴롭힌 인간과 종이 같은 다른 인간들을 원망하길 바란다. 하지만 강아지는 그러지 않는다. <환상의 마로나>의 주인공 또한 마찬가지다. 어째서? 영화는 주인공의 처음이자 마지막을 관통하는 대사를 통해 나름의 이유를 부여하고자 한다. ‘마로나’는 자신을 공원 어딘가에 묶어두고 버스를 타고 가버린 솔랑주를 끝까지 따라가다가, 자신을 미처 보지 못한 차에 치여 죽어가며 이렇게 말한다. “여기는 영점의 영점이다. 무가 되는 순간. 이름도 없고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갈색 털을 가진 친구는 새로 만난 반려인들에 의해 떠나왔거나 버려진 상처를 치유하지 않았다. 언제나 공존하는 현재만을 살며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해 왔다.


<환상의 마로나>는 주인공의 삶을 연민하기를 거부한다. 오히려 주인공은 슬퍼하는 솔랑주를 위로한다. 그런 주인공의 마음을 비치듯, 영화는 소중한 생명체가 나름의 소명으로 세상에 왔다 간 듯이 주인공의 마지막을 얼룩화한다. ‘마로나’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떠난 강아지는 그 도로에, 그 세상에 평생 남아있을 것이다. ‘아홉’이자 ‘아나’이자 ‘사라’이자 ‘마로나’로. 개인적인 바람으로, 이 영화를 본 모두가 상처받길 바란다. 그리고 그 상처를 강아지의 방식대로 치유하길 바란다. 자신과 함께한 그리고 함께할 모든 동물들에게 공평한 사랑을 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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